제6편 : 제망매가
♤ 향가 이야기 ♤
- 제6편 「제망매가」 -
"만약 현대의 어느 시인이 이 내용 그대로 똑같이 지금 발표했다 해도 우수작으로 뽑힐 것이다."라고 향가 가르치던 교수님께서 극찬했던 작품, 오늘은 향가 가운데 가장 문학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다루고자 합니다.
「제망매가」는 8세기 경 신라의 승려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10구체 향가입니다. 달리 '위망매영재가 (爲亡妹營齋歌)'라 부르기도 합니다.
먼저 배경설화부터 봅니다.
"월명사가 760년(경덕왕 19년)에 산화공덕(散花功德 : 부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 발길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의 뜻)을 올리는 재(齋)를 지내는 행사에 나아가 ‘도솔가(兜率歌)’와 ‘산화가(散花歌)’를 지어 불렀다. 그랬더니 미륵보살이 동자로 내려오시고, 해가 둘이 나타나서 열흘이나 계속되는 변괴가 없어졌다.
또 죽은 누이를 위하여 「제망매가」를 지어 불렀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 지전(紙錢 : 종이돈)을 서쪽(극락)으로 날려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피리를 잘 불었으며, 그가 달밤에 피리를 불면 달마저 흘러가기를 멈춰기에 그가 즐겨 불었던 사천왕사 주변 거리를 월명리(月明里)라 하였다."
이 배경설화에서 제망매가와 관련되는 부분은 아주 짧지만 다 해명이 됩니다. 왜냐면 노래를 짓게 된 배경이 바로 '누이의 죽음'이란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바른 길로 살다 죽으면 극락에서 만나게 되니 도 닦으며 기다리겠다는 불교적 극복 의지를 드러내는 노래입니다.
노래 내용은 고교 때 배워 다 아실 겁니다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적어봅니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次肹伊遣),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태어나서는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 : 극락)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겠다.”
(원래는 붙어 있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세 단락으로 나눔)
이 작품 해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2연 끝 "次肹伊遣(차힐이견)" 입니다. '두려워'로 읽거나, '머뭇거리고'로 읽거나 '의지하거나'로 읽자는 세 주장이 있는데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집니다. (위는 편의상 양주동 박사의 해독을 따름)
1단락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계기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했다면, 2단락에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나무(삶)와 낙엽(죽음)에 비유하였고, 3단락에서는 그러한 죽음의 불가해성(不可解性 : 말이나 글로 해석할 수 없는)을 불교적으로 승화시키면서 내세에서 다시 만날 것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향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함은 이 세상은 도를 얻었든 얻지 못했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아픔을 누구든 다 지니며, 그 아픔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무상한 인생에 비유하는 뛰어난 표현력과, 그리고 핏줄로 얽혀진 오누이 간의 우애가 숭고한 불교 의식과 함께 승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령 교수가 이 작품을 좀 다르게 본 내용을 적습니다.
“삶과 죽음의 길로 해석하는 ‘생사로(生死路)’가 산스크리트어인 'Samsāra'를 뜻하며 이것이 중국어(한자)로 번역되면서 생사로가 되었다. 'Samsāra'는 ‘윤회’란 뜻으로 끝없이 죽고 사는 것을 되풀이하며 삶에 괴로움을 더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석했을 때, 마지막 행의 ‘道(도) 닷가 기드리고다’의 의미는 윤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벗어나느냐의 해법을 말하게 된다. 곧 열반의 세계(니르바나)’로 가는 것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道 닷가 기드리고다’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행을 의미한다.
윤회에서 벗어나야만 누이와 나의 관계가 진정으로 혈연관계에 있게 되는 것이며 윤회에 머무르는 한 누이와의 관계는 헛된 것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노래는 8고(苦) 중 하나인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읊은 시다. 그 괴로움을 없애려 도를 닦아 이승이 아닌 미타찰(극락)에서 만나는 것만이 참된 만남이 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제망매가」를 마무리하면서 향가의 지은이에 대하여 잠시 아는 대로 적어봅니다.
향가 지은이는 모두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봅니다. 유일하게 「서동요」의 작가가 백제 무왕이라고 언급돼 있습니다만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다시피 누군지 명확하지 않은 형편입니다. 특히 서동은 한 개인 이름이기보단 '마를 파는 아이를 통칭하는 이름'이다 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마치 구두 닦는 사람을 구두닦이라 하듯이.
이 이론에 대한 실마리를 이 노래의 배경설화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피리를 잘 불어 그가 달밤에 피리를 불면 달마저 흘러가기를 멈춰 밝게 비추기에 그가 즐겨 노닐던 사천왕사 주변 거리를 월명리(月明里)라 하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원래 이름이 월명사가 아니라 '달(月)이 밝게(明) 비치는' 일을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여깁니다.
나머지 이름은 그 향가 다룰 때 언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