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 직원은 블랙을 입는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궁금하신 사항 있으시나요?”라고 물어주셨고 나는 “참, 옷과 신발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하고 대답 겸 질문을 했다. 지난 면접 때 놓친 부분이었다. “편안하게 입으시면 됩니다. 직원들은 흰색이나 검은색을 입으시더라고요. 검은색 옷으로 준비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검은색 옷이라...’남편의 자리를 제외한 나와 아이들의 공간엔 검은색이 거의 없다. 남편의 취향도 블랙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회사를 다니고, 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다 보니 옷이 성할 날이 없어서 가끔이라도 어두운 계열의 옷을 사긴 하는데, 나의 자리엔 검정은 정말 몇 벌뿐이다. 그마저도 전에 회사 출근할 때 입으려고 산 슬랙스와 니트 정도? 그런데 출근 복은 검은색으로 준비해달라니.
필요한 소비인데 사고 싶지 않은 것을 사야 한다. 이만큼 괴로운 것이 없다. 아이 둘을 낳고 나니 쇼핑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야 할 것은 많고 시간은 없다. 무엇이 꼭 필요한지 아닌지, 필요하다면 어느 브랜드의 것을 사야 하는지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 그 막막함이란. 바다에서 잃어버린 반지 찾기 수준이다. 젖병의 세계만 해도 알지 못하는 무한의 세계였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나한테 필요하지 않더라도 때가 되면 사야 할 리스트들이 쌓여가고 최고가 아닌 최선의 쇼핑은 즐거운 일이 아니라 숙제가 되었다.
이번에 사야 하는 출근 룩도 마찬가지. 어떤 스타일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지 사전 정보가 없다. 그 이전에 나는 옷걸이가 형편없는 편이라 아무 데서나 옷을 구입할 수 없고 아무 옷이나 입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러면서도 편하고 시원(여름에 첫 출근을 했으므로) 해야 한다. 같은 옷에 다른 몸이라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유니폼은 없는 편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출근을 기다리는 동안과 일을 시작하고 몇 주까지 필요한 옷을 고르느라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했다. 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줄었는데 그 시간에 쇼핑이리니!
출근 전 급하게 빅 사이즈 쇼핑몰에서 몇 벌 사보았는데 딱 가격만큼의 소재라 옷이 금방 망가졌다. 한 번은 일 때문에 왔다가 일하는 나를 보고 간 남편이 옷 좀 사야 하겠다며 쇼핑을 제안했다. 내가 집안일을 할 때 소파에 앉아 신문이나 폰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면, 저 사람은 눈치가 없는 건가 배려가 없는 건가 속이 답답하다가도 이런 멘트 한 마디면 혼자서 살살 녹는다. 그래도 티를 내지는 않는다. 나는 생각보다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니까.
아무튼 한 달여 동안 일을 하며 옷을 고르는 조건은 단 한 가지로 줄었다. 편함. 사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는 세탁과 건조가 편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다. 이 조건에는 옷을 다리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내포되어 있다. 두 번째는 입었을 때 편안할 것이라는 의미의 편함이다. 여름부터 겨울이된 지금까지 일을 하다 보면 언제나 덥고 종종 구슬땀을 흘린다.
그렇게 정착한 브랜드는 크게 세 개다. 상의는 유니클로. 유니클로에서는 39,900원인 셔츠를 가끔 29,000원에 판매한다. 반팔 티와 가을맞이 카디건도 샀는데 가성비적이 면에서 이 셔츠가 최고다. 하의는 안다르 팬츠. 통기성이 좋다. 나는 상당한 덜렁이라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며 몇 번 바지에 쏟은 적이 있었는데 속옷은 축축해도 바지는 다 말라 있더라. 커피도 순식간인데 땀은 어련할까. 겨울엔 추워서 압박스타킹의 도움을 받는 중이다.
최근에 산 것 중 아주 잘 입는 것을 생각하면 미코 프로젝트라는 브랜드의 재킷이 있다. 이 브랜드 제품은 소재도 물론 마감도 좋아서 생각보다 비싸지만 옷을 입으면 저렴하게 샀구나 알게 된다. 매일 입다 보니 오히려 본전을 찾고도 남았다. 게다가 사이즈가 넉넉해서 정말 편하고 일하면서도 멋스럽게 일할 수 있다. 패스를 벗으면 그냥 외출복이니까 아이들 하원할 때도 좋다.
겨울이 되어서 유니클로에서 패딩을 샀다. 얇은 누빔 패딩을 가고 싶었는데 가격이 만만치 않아 이 가격이면! 하며 덕 다운을 질렀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몇 번 옷을 입었더니 옷깃에 하얗게 메이크업이 묻어난다. 이건 뭐... 하얀 옷에 땀 자국만큼 지저분하다. 지난 주엔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워터 클렌징 제품과 주방 세제를 섞어 얼룩진 부분을 손세탁 했더니 말끔해졌다.
블랙 의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검은색 옷을 어떻게 깔끔하게 유지하고 입는 걸까. 흰색만 입던 나는 흰색이 제일 관리가 불편한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추워질수록 검은색 옷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먼지가 달라붙는 것이 싫어서 흔히 입는 플리스나 양털이 달린 제품을 꺼리게 된다. 블랙은 생각보다 더 차가운 컬러였다.
자주 입다보니 나도 생각보다 검정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밝은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할지 고민한다. 가끔은 그 모습이 너무나 어색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블랙만 입지는 않겠지. 아니 어쩌면 이러다가 블랙이 최애의 컬러가 될지도.
오늘의 드레스 코드도 블랙. 8시간 미션 수행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