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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경계에 대하여

고작 한 걸음의 마음가짐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

by 이덕준

​ 일을 하다 보면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다. 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넘어오는 고객들이 있어서다. 언어적인 영역도 그렇고 물리적인 공간도 그렇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영역. 나는 그와 아무런 유대 관계가 없음에도 “이건 얼마야? 달러 말고 우리나라 돈으로 얼마냐고. 뭐가 그렇게 비싸. 어휴 하나 줘.” 혹은 나의 영역 안에 있는 제품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어 물건을 가져갈 때. 카드 결제 기기에서 삐빅 하는 소리가 나면 엄연히 그것은 그의 것이지만 아직 내 영역에 있기에 황급히 그의 손을 붙잡는다. “봉투 안에 영수증 넣고, 개봉금지 스티커 붙인 후에 드릴게요.” 그것까지 해야 그 물건은 그의 영역 안으로, 그의 품으로 들어간다. 돌아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영역으로 물건을 보낼 때 나의 임무가 마쳐진 것이리라.


우리는 크기의 차이지만 상대방에게 허용하지 않는 개인적인 영역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아이에게 줄을 설 때도 앞사람에게 너무 붙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아이는 닿지도 않았는데 왜 문제가 되냐는 듯 나를 바라보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것 같은, 보이지 않은 영역의 경계선이 나와 남편에게는 분명하다. 붉은 등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경고음을 낸다. 그래서 가끔 아이의 영역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무리하게 아이의 손을 잡아끌어 나의 영역에 아이를 가두고는 한다. 타인의 영역을 침범해서 서로에게 초래되는 불편함을 피학고 싶어서 아이의 영역을 부서뜨리는 것이다.

이번 여름,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일자리를 찾았다. 더 미룰 수도 없이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복직이냐 새로운 일이냐의 기로였는데, 하루 만에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바로 면접을 보러 갔다. 그곳이 이곳이고 그러니까 난 아주 며칠 사이에 직장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여보 면세점 들리자.” “그래. 뭐 살 거 있어?”“나 마실 술 사려고.” 그는 술을 무엇을 살까 고민하러 갔고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사지 않아요. 그냥 구경만 할 거야.” 이미 여행 중에 우리는 충분한 소비를 했다. 아이들은 크레파스 모양의 초콜릿을 보여주며 신기하지 않으냐고 물었고 사고픈 마음을 눈치채고서도 “응, 정말 신기하네.” 하고 말하며 제자리에 두었다. 매장 안은 한적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물건을 사는 사람도, 판매를 하는 사람도 몇 없었다. 출국할 때 디올 볼 터치 두 개 중에 고민하다가 하나를 샀는데, 구입하지 못했던 다른 컬러가 아른거려서 여행 내내 디올 매장만 보이면 고민을 했다. 면세점은 마지막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둘러보았지만 없었고 이번에는 두바이 초콜릿이 있나 찾아보았다. ‘음, 두바이 초콜릿은 두바이에서 사 와야 하나보다’ 순간 고개를 들어 매장을 돌아보며 혹여나 이곳에서 내가 일을 할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때마침 남편이 술을 한 병들고 왔다. 지금 생각하면 두 병 사지 왜 한 병을 샀나 모르겠다. 두 병 사면 10% 할인인데!


8월이 되면,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짧아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무리해서 여행을 다녀오던 참이었다. 남편은 탑승동으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하는데, 아이들이 힘들 거라며 T2에서 이동할 수 있는 비행 편을 알아봤고 그곳에서 우리는 출국했다가 입국했다. 그리고 몇 주 뒤 나는 그곳으로 출근했다. 임시 패스를 목에 걸며, 팀장님의 인솔을 받아 항공기 탑승 지역으로 들어섰다. 낯익은 공간에서 마주한 이 생경한 느낌을 뭐라고 해야 할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출국하려 하러 왔다가 이제는 출근이라니. 문도 없는 매장. 마감이 다른 바닥을 지나면 면세점이고, 절대로 들어설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캐셔의 공간에 나는 서있다. 내가 어떤 위치냐에 따라서 내가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이 정해진다. 물론 누구나 그곳에 물리적으로 발을 들일 수는 있겠지만 그 순간 아마 그는 알 것이다. 그 공간은 당신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어디에도 모든 곳에도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살아간다. 여기는 넘어오지 마세요. 여기는 나의 공간입니다. 경계선이 없고 경계석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한 걸음 뒤에서 관람해 주세요.”

관람객들은 모두 한 걸음 물러나 작품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커다란 구멍 안의 내용이 궁금한 눈치였다. 그들의 상체가 작품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있었으니까. 그러나 누구도 발을 옮기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더 깊은 것을 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마음 한편에 접어두었을 것이다. 나와 아이들도 그렇게 한 걸음 뒤에서 작품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애써 멀어진 이 한 걸음이 작품을 지키리라 하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경계에 대해 경계해야 할 것은 고작 ‘한 걸음’뿐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쉽게 손을 뻗는 손길, 궁금하다고 앞뒤 없이 다가가는 발걸음, 이미 잘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던지는 무례한 말들. 위하는 일이랍시고 아이의 영역을 무시하는 일. 사실 우리는 서로라는 존재를 ‘고작 한 걸음의 마음가짐’으로써 충분히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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