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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면세점입니다.

내 자리는 없는 직장에서는 모든 곳이 내 자리다.

by 이덕준

안녕하세요. 여기는 면세점입니다.


4시 30분 나의 첫 알람이 울린다. 첫 알람이 울린다는 것은 그 이후로 몇 분 간격으로 알람이 반복해서 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날에는 두 번째에 어떤 날에는 세 번째에. 오늘 같은 날에는 도저히 미룰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난다. 5시 45분. 나가야 한다. 5시 50분 나가야만 한다. 5시 56분 그냥 나간다. 6시 10분에 주차장에 도착하면 걸어간다. 6시 13분에 도착하면 빨리 걷는다. 15분 이상이면 뛴다. 최대한 아침부터 뛰지 않는 시작을 해보려고 노력한다. 언제나 늦어도 6시 20분이면 도착하지만 매장이 분주하면 아차 싶다. 우리의 정식 출근 시간은 6시 30분이다.

서랍에 공간이 보이는 대로 대충 가방과 외투를 쑤셔 넣는다. 한 사람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가 시재금을 확인한다. 한 자리에 두 사람이 서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야간 근무자는 쏟아지는 손님을 상대로 계산을 하고 나는 쏟아져 있는 돈뭉치를 쥐며 돈을 센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돈을 세 본 적이 별로 없다. 숫자에도 약하고 셈에도 약하다. 그래서 간단한 돈 세기도 처음에는 몇 번이고 다시 세고 다시 세기를 반복했다.

시재금 영수증에 Ok 동그라미를 친다. 이제 홀로 선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든다. ‘안녕하세요. 여권 부탁드립니다.’ 계산을 시작한다. 여권을 스캔하고 비행기 편명을 입력한다. 물품을 집어 바코드를 찍는다. 상품마다 제각각인 할인율을 반영해서 입력하고 현금을 세거나 카드에 적힌 이름과 할부 여부를 확인한 후 계산한다. 봉투에 담아 개봉금지 스티커를 붙여 건넨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짧은 인사를 먹어치우며 한 사람이 간다. 소화할 틈이 없이 새로운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만 손님이 왔다가 가면 감사할 따름이다. 여권이 왜 필요하냐고 따지는 사람, 편명을 어떻게 아냐고 되묻는 사람, 반말을 하는 사람, 돈에 퉤퉤 타액 스프레이를 뿌리며 현금을 세는 사람, 돈뭉치를 그냥 주더니 나더러 세라는 사람(본인 돈 아닌가?) 담배는 왜 한 사람당 하나냐고 어쩔 수 없는 규정에 화내는 사람, 별로 싸지도 않다며 욕하는 사람, 쿠폰 적용해 달라고 떼쓰는 사람, 여권과 카드에 적힌 이름이 달라도 계산해 달라며 억지 부리는 사람, 부주의하게 술병을 들다가 깨뜨리고 도망가는 사람, 대놓고 싸우는 커플 등 수많은 사람을 마주한다. 더러는 계산을 하는 1분 이내에 품격이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메인 포스의 자리는 두 자리이기 때문에 인원이 많으면 매장을 돌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도움이 필요한지 묻고 안내를 한다. 물건이 빠진 자리는 수시로 채워 넣는다. 매장이 조금 한산해지면 주류부터 몇 가지 품목에 대해 재고조사를 한다. 그리고 부족한 만큼, 이고 신청을 해둔다. 한가한 날에는 8시면 이 일과가 마무리되고 바쁜 날에는 11시까지 쉼 없이 계산을 하기도 한다. 10시에는 두 가지에서 세 가지 브랜드의 담배 재고를 한다. 중간에 30분 정도 휴게시간을 갖는다.

8시 이전에 쉴 수 있을 때는 아이들과 잠깐 통화를 했었다. 요즘에는 너무 바빠 어림없다. 종종 남편이 아이들 사진을 보내오면 몰래 꼭 안아보고는 한다. ‘오늘도 아침에 엄마가 사라졌다며 하다가 울었어.’, ‘오늘은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도망가서 안아서 버스에 태웠어.’ 매일 함께 했던 일상을 해줄 수가 없다. 그래도 매일 볼 수는 있으니까. 캐셔인 내가 엄마인 나를 위로한다.

11시에서 12시 30분 사이에 점심을 먹는다. 5,500원 식권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직원 식당뿐이다. 돈을 더 내고 다른 것을 먹어도 되지만 도시락을 싸는 것을 택했다. 전날 저녁에 잠깐 분주하면 다음 날엔 메뉴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식권으로는 커피를 사서 먹는다. 그리고 책을 읽고 가끔은 글을 쓴다. 접이식 키보드도 하나 샀다.

내가 점심시간에 주로 머무르는 곳은 3층 탑승동인데 사람이 늘 많다. 다른 직원들은 그 시간에 잠을 자기도 하고 쉬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아깝다.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 시간이라서 그 시간에 책을 읽지 않으면 종일 나에게 종이에 적힌 활자는 영수증뿐이다. 그래서 나는 졸더라도 책을 편다. 어떤 날엔 너무 피곤해서 그냥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때처럼 고개를 파묻고 잠을 청하기도 한다. 어차피 여기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한 번 보고 말 것이고, 혹여나 오늘 탑승했던 사람과 며칠 뒤 계산대 앞에서 마주하더라도 우리가 알아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 저런 이유로 가방은 터질 것 같다. 전에는 가방 두 개를 가지고 다녀서 한 개로 줄이라는 특명을 받고 하나로 줄였다. ‘가방 두 개인 사람은 롱패딩 금지’라는 장난 섞인 지침이 내려와서 롱패딩을 포기했다. 두 개 같은 가방 한 개 때문에. 나는 내 가방을 종종 내 욕망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정말 내 욕망 자체이다. 책과 펜과 키보드. 줄일 수 없는 욕망이다.

오후 근무자의 식사를 위해 교대를 해준다. 첫 출근처럼 시재금을 확인한다.이고 신청해 둔 물건들이 창고에서 나오면 품목과 수량을 확인하고 정리한다. 여기서 하는 일이 단순 서비스 같지만 뒤에서는 확인과 확인, 끝없는 확인이 필요하다. 물건이 하나 내 손에 들어갈 때까지 수십 번의 확인을 거친다. 그러니 내가 구매자가 되었을 때도 어떤 물건도 대충 골라 내 집에 들여선 안된다.

먼지도 꼼꼼히 털어낸다. 먼지는 이 매장이 지금 관리가 되고 있는지 안되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너무 바쁠 때는 어쩔 수 없다지만 이것까지가 내 역할이 아닐까. 이런 마음가짐까지가. 지금 여기에 온 사람이 보는 나는, 이곳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거창할 것 없어 보이는 일에 거창한 직업의식을 붙여본다.

공무원이었을 때는 ‘공무원은 공노비야.’라고 말하면서도 어디서 직업을 말하는 게 부끄럽지 않았다. 특히 아이들의 선생님과 마주할 때. 지금은 어떤 일을 하는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다. 하급 공무원일 때나 지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장 만만하고 쉽게 보이는...... 뭐랄까 오징어 발끝같이 가장 먼저 물어뜯게 되는 위치라고나 할까. 그래도 그때는 사무실에 내 자리가 있었다. 여기서는 매장 어디에서든 서 있어야 한다. 내 자리는 없다. 그래서 이 매장 모든 곳이 내 자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있지만 앉을 수 없는 의자는 없는 셈 친다.

하루 종일 물건을 정리하고 먼지만 털고 있는 날도 있다. 주저앉아 먼지와 씨름하고 있으면 사실 먼지를 없애는 데에 집중하고 신경 쓰느라 별생각이 들지 않는다. 일어나 머리가 핑 하고 돌다 정신이 들면 이런 시간이 아까워진다. 우리 아이들은 뭘 하고 있을까. 아무리 의미를 붙여보아도 나는 내 자리가 필요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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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고 피곤해



출근할 때부터 피곤했다.

문을 나서면서부터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지개를 켜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앉았을 때부터

몇 번이나 알람을 껐을 때부터

알람이 울리기 시작한 4시 30분부터.


피곤했다.

이 피로는 어디서 온 것일까.

어제의 나로부터?

출산 혹은 임신으로부터?

아니면 언제부터?


우주는 늘 묻는다.

요새는 하다도 묻는다.

내일도 어린이집에 가냐고.

왜요?

엄마가 쉬어도 가요? 왜요?


글쎄 왜일까.

왜 너흰 어린이집에 가고

엄마는 출근하러 가야 할까.


사실 엄마도 잘 모르겠어.

모르긴 몰라도 가야 해.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싫어도.


그래 이 피로는 싫기에 기인한 것이겠지.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지쳐도 눈이 번쩍 떠졌을 텐데.

하염없이 걷고 걷는

앉을 틈 없이 일하는 지금도 좋았을 텐데.

휴게시간 30분.


이제 끝


아 피곤하다 피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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