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가족 등반
큰손자 성호와 둘째 손자 성규가 외갓집에서 두 번째 자는 날.
두 손자는 작년 추석 외갓집에서 처음으로 잤다. 큰손자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외갓집에서 잤다며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우리 넷은 거실에 이불을 쫙 펴놓고 나란히 누웠다.
베란다 너머 둥근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손주들은 내 팔을 한쪽씩 붙잡고 좋다며 소리쳤다.
기분이 너무 좋아 잠도 스르르 왔단다. 그 뒤로 할머니 집에서 잠잘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손주들.
오늘은 설날 두 딸네와 온 가족이 모였다. 하루 종일 맛있는 것 먹고 장기 자랑도 하며
실컷 놀고 집으로 갈 때였다. 손주들이 떠날 때는 언제나 시원섭섭하다.
“할머니, 형이랑 자고 가도 돼요?”
갑자기 성규는 한 마디 툭 던지며 할머니 표정을 살핀다.
“안 돼, 할머니 피곤하잖아. 할머니가 허락하지 않을걸.” 큰딸이 말했다.
“그래. 자고 가라.”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다.
성호와 성규는 뛸 듯이 기뻐하며 잠잘 준비를 했다.
딸과 사위는 자기도 자겠다며 떼쓰는 막내를 겨우겨우 달래 집으로 돌아갔다.
둘째 사위도 이제 세 살 된 손자에게
“유준아? 너는 언제 커서 형들이랑 외갓집에서 잘래? 형들이랑 자면 신날 텐데.”
다음 날 아침 성규는 반쯤 뜬 눈으로 일어나 조용히 할머니를 찾았다.
언제나 새벽 일찍 일어나 내 방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쓴다. 성규는 내가 누워 있는
침대로 스르르 밀고 들어와 안기며
“할머니 품은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해서 좋아요.”
품 안으로 기어드는 손자 냄새가 코끝에 머문다. 할머니의 덜렁덜렁한 팔을 만지며
성규는 여섯 살 때 일을 꺼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에선 일 년에 한 번씩 음악회를 연다.
우리는 할머니와 손자 팀으로 참가해 <You are my sunshine>을 불렀다.
“할머니, 그때 불렀던 노래 한 번 불러 봐요. 다 잊어버렸어요.”
“다시 부르면 생각날걸.”
아침부터 YouTube로 무려 다섯 번이나 불렀다. 목이 트이지 않았지만 손자와 함께하니
신났고 노래 가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린 아침부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소중한 추억을 나눴다.
“아침밥 먹고 10시에 등산 출발할 거다. 그때까지 준비 완료, 알았지?”
할아버지가 겨울인데 날이 따뜻하니 산에 가자고 한다. 큰딸도 산으로 오기로 했다.
오랜만에 등산이라 힘들 거다. 손주들은 날쌘돌이처럼 산을 오른다. 얼마 오르지 않아 힘들다고 난리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청량한 사이다처럼 톡 쏜다.
“성호야? 너 지금 산에 갔다 오면 삼일 동안 장딴지나 허벅지 근육이 아프고 힘들 거야.
그래도 며칠 후엔 할머니 할아버지랑 함께했던 등산이 뿌듯할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보니 정상이 저만치 보였다. 겨울 산이라 조심스러웠지만 손주들과
오랜만에 등산하니 가슴이 확 트이고 하늘은 유난히 맑고 청량해 보였다.
“아유! 힘들어.”
우리는 아무 데나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지만 성규는 형이 편안히 누워 있는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불편한 돌에서 쉬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깔깔거렸다. 둘째 손자, 성규는 뭐든지 일등 하고 싶은 욕심이 많은 아이다.
“하하! 우리 성규는 일등 해야 해서 돌 위에 불편하게 앉아 있구나!
성규야 일등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
“왜요? 나는 일등이 참 쉽던데요.”
“일등을 넘보는 사람들이 되게 많잖아. 일등은 하는 것보다 지키기가 더 힘든 거야. 형이나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는 편안하게 쉬고 있지. 그런데 우리 성규는 항상 일등 해야지 하고,
앞으로 뛰쳐나가야 하니까 편하게 쉬지도 못하잖아!”
나는 손주들 놀리는 맛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이렇게 늦어요?
할아버지가 먼저 등산하자고 했는데 왜 이렇게 늦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허리가 아프잖아. 다리도 아프시고 나이가 드니 마음은 청춘인데 몸이 말을 안 듣네!
게다가 이 산은 할머니, 할아버지같이 나이 든 사람에게는 좀 높고 가파르다.
할아버지가 제일 꼴찌야.”
“나는 꼴찌다. 꼴찌라도 좋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일등도 할 수 있는 거야.”
우리는 할아버지를 뒤로한 채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어느샌가 할아버지가 성규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햐아~~~ 나 일등 했다. 사람이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일등도 하는 거야.
일등은 항상 주변 사람을 경계해야 해서 마음이 초조하지.”
“할아버지, 왜 이렇게 일등 하기가 힘든 거예요?
나는 일등 하는 것은 쉽고 편한 줄 알았어요.”
“일등 하기 위해서는 항상 생각도 빠르게, 동작도 민첩하게 해야 하므로 피곤할 때도 있어.
그냥 천천히 가자. 그래야 나뭇가지에 있는 새 둥지도 보고, 파란 하늘에 떠 있는 구름도 보고,
정말 멋있잖니! 새해 첫날 이렇게 가족들과 등산하는 거 굉장히 좋은 일이야. 가끔 우리 또 등산하자.
꽃필 때도 하고, 낙엽 질 때도 하고. 머리 벗어질 정도로 뜨거운 여름날에도.
산에 오르면 푸른 숲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어. 그러다 보면 다리도 튼튼해지고
몸도 튼튼해지고 푸르른 경치를 보니 눈도 시원해지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우리 성규 마음도 느긋해지고 자연을 느끼면서 이렇게 맛있는 간식도 먹으면서 사는 거야 알았지?”
라고 말하시며 할아버지는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성규야 사과 한 입 먹을래?”
성규 마음을 떠본다. 성규는 할머니가 내미는 사과를 덥석 잡을까 말까 주저하면서 한입 베어 물었다.
시원하고 맛있다며 싱긋 웃는데 먹는 모습도 어쩜 이리 귀여운지!
“햐아, 우리 성규가 일등이다. 대단한데!
성규야 일등 그까짓 것 형한테, 동생한테 넘겨줘도 괜찮아!”
라며 할아버지는 환하게 웃는다. 성규는 즙이 팡팡 쏟아지는 사과 한 입을 얼른 베어 물고,
재빨리 또 일등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진 돌에 불편하게 앉는다. 승부욕이 남다른
성규는 편안하게 앉아 있으면 형이 불쑥 튀어 나가
“내가 일등이야.”
이렇게 말할 거 같다며 씽긋 웃는 데 진짜 일등 하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보인다.
새해 첫날 일출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렇게 등산하고 내려오면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즐겼다.
오래전부터 할아버지는 손주들을 데리고 이 산을 오르고 싶어 했다. 우리 동네 아주 가까운 곳에
이렇게 멋진 산이 있다는 것을 손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높은 곳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며
감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했다. 다정한 말과 눈빛으로 손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산 아래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무슨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여주고 싶은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 아무리 어른들의 생각을 심어주고 싶지만, 아이들의 시선과 감각은 달라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주들이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경험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듯하다.
언제나 복잡하고 분주한 도시지만,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면 잔잔하고 평화롭게 보일 수도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새해 첫날 힘든 몸을 이끌고 손주들과 등반을 한 이유다.
등산을 끝내고 나니 배가 고팠다. 힘든 등산 뒤에 밥맛은 어느 때보다 꿀맛이겠지!
우리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음식점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