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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림이 언니 최윤순 Oct 20. 2023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출발


      (할머니와 6살 손자가 음악회에 출연하다.)


  나는 노래 듣고 부르는 걸 무척 좋아한다.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음주 가무에 능했고 고대 그리스 제단에서도 음주 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노래를 부르면 흥이 나고 춤은 못 추지만 몸이 멜로디를 탄다는 것이 흥미롭다.  

언젠가 딸들과 쇼핑 중에 AQUA의 BABIE GIRL이라는 신나는 음악이 나왔다. 신나서 흔들어 댔더니 딸들은 엄마 이상하다고 도망쳤던 기억이 난다. 푸하하하.

나의 영어 이름은 Melody이다. 나는 당치도 않게 젊었을 때 오페라 가수라는 꿈을 꾸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나름 의미를 부여해 Melody라고 이름 지었고, 내면 어딘가에서 음악성이 생기는 듯한 착각 속에서 살아왔다. 


  몇 년 전 코로나 팬데믹이 있기 전에 우리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에서는 아파트 연못 앞에서 버스 킹처럼 음악회를 열었다. 시민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고, 성악가도 초청해서 아파트는 자유롭고 생기발랄한 분위기였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손잡고 놀이터에서 그네, 시소, 미끄럼틀도 타고 행운권도 추첨하며 축제 분위기 속에 즐거워했다.

올해도 나는 입주자 대표단에서 오랫동안 코로나로 지친 입주민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음악회가 열린다는 현수막을 봤다. 이번 음악회의 특징은 노래 파트 1팀, 악기 파트 1팀이 입주민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나는 호기롭게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연히 그날 아침 한 친구로부터 <you  are  my  sunshine.>이라는 동영상을 받았다. 몇 년 전 <you  are my  sunshine> 곡에 맞춰 여고 친구들과 신나게 라인댄스 공연을 했었던 추억이 깃든 그 노래였다.


  이 동영상에서 원래 부드럽고 감미로운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 목소리와 닮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도 부를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막연히 들었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교수는 “근거 있는 자신감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유연성과 끈기를 길러준다.”라고 했다.


  나는 천부적인 재능에 수년간 다져와 내공으로 물 흐르듯 감미롭게 부른 원가수의 노력을 그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감히 그 가수를 흉내 낼 수 있다는 무모한 도전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음악회 때는 입주민 참여 경쟁률이 더 높아져 참여가 어려워지겠다는 얕은 생각에 일단 신청서를 이 메일로 보냈다. 신청서에 간주 부분은 10살 손자가 오카리나로 불고 내가 팝송을 부를 계획인데 아직 딸과 손자한테 확인은 못 받았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간주 부분이 허밍으로 나와서 이 부분은 손자에게 오카리나로 불게 하면 분위기가 더 어울리겠다는 내 나름의 기획을 짜고 혼자서 상상하며 행복했다. 상상만으로도 너~~ 무 기분이 좋아졌다. 그 후로 나는 산책할 때, 운동 갈 때, 혼자 있을 때도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기만 하면 동영상을 열심히 보며 계속 노랫말과 음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딸한테 나의 계획을 말했다. 그 곡은 어려워서 손자가 오카리나로는 못 불고 리코더로 할 수 있겠다고 했다. 며칠 후 손자와 리코더로 맞춰보니 내 목소리는 중저음이고 리코더는 너무 높아서 음색이 맞지 않았다. 손자는 부끄러워서 안 하겠다고 해 결국 나 혼자 하기로 했다. 

  신청자 오디션이 있다고 해서 참석했더니 오케스트라 단장, 관리소장, 몇몇 젊은 입주자 대표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동영상을 틀고 자신감 있게 노래를 크게 불렀다. 그들은 내 큰 목청에 깜짝 놀라더니 잘 부른다고 목소리를 어떻게 관리했냐며 반가워하시고, 합격이란다. 즉석에서 딸과 문자로 확인하니 손자가 못한다고 한다. 입주자 대표회장님이 홈 탐하며 “손자는 그냥 손만 잡고 립싱크해도 그림이 좋을 것 같다.”라고 손자랑 함께하기를 여러 번 말씀하셨다. 

 사실 손자들 영어 실력은 이 할머니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대단한 실력자들이다. 여러 궁리 끝에 10살 손자가 아니라 6살 손자를 요즘 유행하는 포켓몬 카드 5만 원짜리로 선물하며 같이하기로 약속했다. 우린 따로 또 같이, 차 속에서, 모임 때, 내가 딸 집에 갔을 때,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노래 연습을 했다. 심지어 3살 손녀까지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점점 공연 날이 다가오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특히 노래를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부르라고 하니 그것이 관건이고 점점 자신감이 없어졌다. 고민을 작은딸에게 말하니 지금이라도 취소하라고 난리다. 하지만 그것도 약속인데 그냥 포기하고 취소하고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케스트라 단장님에게 내가 연습한 동영상 파일대로 노래 부르고 싶다고 했다. 그러려면 새로 편곡해야 한다며 난색을 보인다. 나는 시창도 못 하고 박치, 음치, 오로지 목청만 조금 괜찮은 듯해서 신청했다. 그런데 노래를 연습하면 할수록 많은 동네 주민 앞에서, 그것도 아는 사람들 앞에서 망신살 떨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우쿨렐레 강사인 친구한테 내가 연습한 노래 파일에 맞는 악보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파일과 딱 맞는 악보는 구할 수가 없다고 한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정확한 악보를 주었을 때 연주가 가능한데 악보 따로, 내 노래 따로, 손자 노래 따로 모두가 따로 노는데 한심하고 불안했다. 오케스트라 단장님께 카톡으로 오케스트라 반주와 맞춰보고 싶다고 했다. 공연 당일 오전에 리허설룸으로 오라고 해서 갔다. 두 번 맞춰보고 어정쩡한 상태로 끝내고 자기들 연주곡 연습하는 시간도 부족해서 난리다. 아주 난감해하며 오후 현장 예행연습에서 6살 손자와 한 번 더 맞춰보기로 약속하고 돌아왔다. 나는 현장 예행연습 직전에 이 노래 Mr를 찾았고 그 파일에 맞춰 부르기로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합의를 봤다.


  진짜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오프닝 순서에 할머니와 손자 팀으로 불렀는데 날씨도 적당히 선선했고 꽤 분위기도 좋았고 관객들이 집중을 잘해 주어서 다행이었다. 작은 딸네 가족도 참여하고 사위들은 근무 끝나고 모두 우리 집에서 모였다. 그동안 세 가족 11명, 7개월 된 아기까지 각자 가족 구성원끼리 코로나에 걸렸다. 그래서 가까이 있지만 쉽게 편하게 만나지 못하는 코로나 시국이었는데 처음으로 온 가족이 모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준비한 백숙에 피자, 아이스크림케이크까지 사 와서 진정으로 오랜만의 우리 집 이벤트가 되었다. 딸과 사위는 엄마가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노래 부른 등단 기념이라며 케이크에 촛불 켰다. 온 가족이 축하 노래를 신나게 불러주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나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서 출발한 이벤트는 온 가족이 다시 한번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끊임없는 도전 의식은 어디서 나올까? 

어렸을 때 제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발표해 보지 못한 결핍에서 오는 걸까? 

나도 이런 나의 돌발 행동이 궁금하다. 

  이렇게 무모한 도전과 어찌 보면 당황스러운 용기가 나에게 또는 손자에게도 오래도록

인상 깊은 추억이 될 것이다.


  그 음악회 준비를 위해 한동안 열정을 쏟으며 조마조마했던 순간들도 귀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런 감정들이 나의 죽은 세포를 살려주듯 했고 오랜만의 두근거림도 기분 좋게 했다. 나의 성향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알게 될 때, 엉뚱한 상상을 한다. 새로 배운 것을 통해 또 다른 창작이나 경험을 형상화하는 이미지를 펼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놀라곤 한다.


  사실 특별한 재능도 없는데 이미지로만 상상한 것을 현실화해서 유 · 무형의 형태로 만들어 내는 작업은 힘들다. 그런데 자주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나의 성향임을 발견한다. 

여전히 꾸준히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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