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흘리는 꽃들이여 더 많이 우시기를
삶의 내용 증명
아마 사춘기를 지날 무렵 알았던 말이었던 거 같다. 선생님이 하신 말씀인지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은데, “하룻밤을 울며 지새워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내 몸 어딘가에 문신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덕분에 마주 앉은 사람과 합(合)이 잘 맞는다.
나한테 대한민국 농촌 마을은 사업의 대상이 아니고 배움의 대상이다. 농촌 고령화가 급속이 진행되면서 60대가 청년으로 불리는 시대. 대부분 마을의 평균 연령은 70대 초중반이다. 노인 한 분 한 분의 인생이 박물관이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르신들이 툭 던지는 한 마디가 삶의 잠언으로 다가오는 때가 많다. 자연의 순리에서 삶의 생리를 배운 덕분에 그분들 말속에는 꽃 피는 소리 비바람 냄새가 잠겨 있다.
내가 고집하는 지역 역량 강화 중 하나는 어르신 삶에 내재한 언어의 보물을 찾아내어 세상에 알리는 거다. 주민 교육에 시 쓰기를 넣으면 반기는 마을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손사래를 치며 싫다고 하신다. 연필 잡아본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시가 뭔지 모른다는 게 이유다. “시 절대 어렵지 않아요. 여러분들께서 툭 하시는 말씀을 종이에 적으면 그게 시입니다. 여러분 말씀 자체에 살아오신 인생이 배어 있어서 종이에 적어 놓고 읽어보시면 입에 착! 붙습니다” 어르고 달래도 토를 다시는 분이 꼭 나온다. “시는 시인이 쓰는 거지 우리 같이 농사만 짓고 산 사람들이 무슨 시를 써? 시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쓰냐고?” 이렇게 투정을 부리실 때 단골 레퍼토리가 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PPT에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띄워놓고 “이 풀꽃을 여러분 자신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 잠시 흐르는 침묵 – 어떠세요? 여러분이 참 예쁘다고 느껴지지요? 내 인생 참 귀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풀꽃 대신 여러분 자신, 남편, 아내,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려보세요. 지금 온갖 추억이 막 솟구쳐 올라 오지요? 나는 아무 생각이 안 떠올라하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 모두 잠잠 – 손 드시는 분이 아무도 안 계시네요. 마음 뭉클하게 옛 추억이 떠오른 순간 여러분은 이미 시인이 되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연필을 잡고 시 쓰기를 시작하면 마을 회관이 숙연해진다.
손톱이 빠지도록 일만 하시던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시는 분,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고 아들딸 잘 키워 보란 듯이 우뚝 선 자신이 대견해서 우시는 어르신도 있다. 이럴 때면 “하룻밤을 울며 지새워보지 않은 사람과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나고 어르신들이 속마음을 모두 끌어내시도록 자꾸 더 울린다. 세월이 약(藥)이듯 눈물도 인생의 좋은 보약이다. 한바탕 울고 나면 쌓인 설움이 씻겨나가 속이 후련해진다. 어르신들에게 이 보약을 선물하는 것도 역량 강화다.
나이가 들면 자존감이 떨어진다. 젊어졌을 때 혈기 왕성한 기운은 모두 삭고 내가 누구인지를 잊는다. 주민 역량 강화는 ‘당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를 스스로 알게 하는 것’, 시 쓰기는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눈물의 내용 증명이다.
신원1리 정초부가 살았던 월계마을
양평군 양서면 신원1리는 조선 후기 양반 사회를 뒤흔들었던 나무꾼 시인 정초부(1714-1789)가 살았던 마을이다. 정 봉(鳳)이라는 이름이 있었다고 하나 그저 초부(樵夫), 나무꾼으로 불렸던 그는 출신이 노비였다. 정조 때 참판을 지내고 양평 양근리에 살던 여춘영 집에서 노비로 살았다.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한시(漢詩)를 하도 잘 쓰니까 여춘영이 그가 43살 되던 해에 노비문서를 불살라 면천되었다. 노비의 족쇄는 풀렸으나 오히려 먹고 살길이 더 막막했던 정초부는 나무를 해다가 한양까지 가서 팔았다. 팍팍한 삶을 시로 달랬던 그의 시는 입소문을 타고 한양까지 알려졌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그를 보기 위해 월계 주막에 머무르며 집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다는 일화와 그의 시가 KBS 역사 스페셜 ‘노비 정초부, 시인되다’와 EBS 역사 채널 e를 통해 알려졌다. 이를 계기로 양평군이 국토교통부 지원을 받아 신원1리에 ‘정초부 지게 길’을 조성했다. 이 길에는 월계 주막과 강한정(江閑亭)이 있어 남한강 자전거 특구 길을 달리는 라이더에게 좋은 쉼터가 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신원1리 주민들은 심드렁했다. 현재의 삶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했고, 자세히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신원1리 지역 역량 강화는 정초부 마을임을 알리는 것에서 출발했다. 정초부의 삶과 시를 주민과 함께 탐색하고 나니 시 쓰기와 자화상 그리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정초부 마을에 산다는 자부심을 심어주니 어르신들의 자화상에는 의기양양한 꽃이 피었고, 자신의 삶을 토로하는 시 속에는 눈물 젖은 세월이 어룽졌다.
눈물보 터진 자작시 낭송 성과 공유회
주민 역량 강화 마지막 차수는 성과 공유회로 마무리한다. 맛있는 점심을 대접하며 그동안 주민과 함께 만든 결과물을 전시하고 담소를 나누는데 신원1리 성과 공유회는 좀 특별했다. 곱게 꾸민 자화상과 시를 곁들여 시화전을 열었다. 그리고 직접 쓰신 시를 낭송하는 기회를 드렸다. 그런데 어쩌나. 한분 한분 낭송을 하시는데 그만 눈물보가 터지고 말았다. 한 번도 자신의 속 마음을 살아온 내력을 털어놓지 못해 멍울졌던 세월의 매듭이 툭! 풀린 것이리라. 아는 사람은 안다. 맺혔던 마음이 풀린 다음의 후련함을, 그 후련함이 삶의 새로운 기운을 준다는 것을.
시(詩) 꽃이 핀 신원1리가 진정한 정초부 마을로 열매 맺어 농촌 활성화의 선진 마을로 변화된다면 상수원 보호구역이라는 높은 벽을 문향(文香)으로 넘을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신원1리에는 몽양 여운형 생가터와 2011년 11월 27일에 개관한 몽양 여운형 생가 기념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