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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Feb 29. 2024

엄마가 나를 떠나기 전에 라면 끓이는 방법을 가르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수제비다. 수제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얼큰한 국물과 쫄깃한 식감의 밀가루 반죽도 한 몫하지만, 엄마가 해준 음식 중 가장 기억에 남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요리를 잘했는데, 그중 왜 하필 수제비인지는 알 수 없다. 논리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때의 일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 뒤로 아빠와 함께 살았다. 중학교쯤, 한 두 번 엄마가 찾아온 것을 제외하고는 엄마를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수제비가 제일 좋다. 사실은 엄마가 끓여준 수제비는 맛도 생김새도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다.


아빠와 살게 되면서 나는 더 이상 수제비를 먹을 수 없었다. 갑자기 남자아이 둘을 키우게 된 아빠는 전형적인 가부장제 아래서 자란 남자였다. 제사를 지내러 큰 집에 갔을 때, 내가 심부름으로 부엌에 들어가면 친척 어른이 "쯧. 사내놈이 부엌에 기웃거리면, 꼬추 떨어진다." 하면서 혼냈을 정도니 말이다. 그렇기에 수제비는 고사하고, 칼국수조차 집에서 끓여 먹은 적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제비는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수제비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는데, 집 근처 시장 안에 허름한 칼국수 집이다. 주말에는 아빠와 칼국수 집에 종종 갔다. 지나가다 앉으면 바로 손님이 되는 다찌석 형식인 그 가게에 앉으며 주문한다. "수제비 주세요". 하지만 역시 수제비를 먹을 수 없었다. "바쁜데 그냥 칼국수 먹지". 아줌마가 무서웠고, 나는 칼국수를 시켰다. 서른이 넘은 지금도, 그 집에서는 수제비를 먹을 수 없다.


엄마는 이혼하기 전에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충분히 예상했던 듯하다.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에, 갑자기 통돌이 세탁기를 돌리는 방법이나 라면 끓이는 방법을 나에게 가르쳤다. 다른 요리보다 간편하고, 김치만 있어도 한 끼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요리가 라면이었다. 아마 다른 요리를 가르치기에는 시간보다도 내 나이가 너무 어렸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엄마는 라면을 끓이고 나면, 가스 밸브를 잠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나에게 신신 당부했다.

ⓒ Mathieu Stern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기 직전에 서명되어 있는 이혼 서류를 우연히 봤다. 사실 보고도 못 본 체했다. 부모님의 이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에는 내 나이가 어렸다. "재용아, 니 엄마 없으면 우짤래?". 한동안 이 말을 들으면서 나는 라면 끓이는 방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나와 동생의 주 식사 메뉴는 라면이었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온 저녁에는 시장에서 사 온 반찬과 고기 등을 먹었지만, 학교를 가지 않는 방학 기간의 점심은 늘 라면을 먹었다.


나에게는 지겨운 라면이지만, 친구들은 내가 끓여준 라면을 좋아했다. 보통 친구의 엄마들은 건강상의 이유로 라면을 끓여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라면을 끓이는 것에 도가 텄고, 내가 끓인 라면을 맛있게 먹는 친구들과 놀던 시간이 즐거웠다. 하지만 나도 라면 끓여 먹는 것을 친구들과는 다른 이유로 눈치를 봐야만 했다. 아빠는 우리 집에 친구들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본인이 없을 때 내가 친구들에게 대접할 것이 라면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 농심. All right reserved.

그럼에도 아빠는 라면을 사다 둘 수밖에 없었다. 나와 동생이 라면 말고 다른 요리를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마트에 갔을 때 제일 비싼 라면을 샀다. 지금이라면 밀키트나 간편식이라도 사놓았을 테지만, 그때는 '생생우동'이 가장 비쌌고, 비싼 것은 몸에 좋다고 여겼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독립한 지금, 나는 '생생우동'이 비싸서 사 먹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 나름의 관심과 미안함이 집약된 구매였을 것이다.


나는 이별이 이렇게 맵고, 또 매운 것인지를 라면으로 배웠던 듯하다. 열 살이라는 나이에 이 세상의 전부와도 같은 존재가 나를 떠날 준비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작 라면 끓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사무치게 매웠다. 매움에 마음이 쓰렸지만 하나도 내색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라면 끓이는 방법과 통돌이 세탁기 돌리는 법을 잘 배워서 엄마를 도우면, '엄마가 나를 안 떠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엄마가 알려 준 라면 끓이는 방법도, 직접 끓여준 수제비 맛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혼란스러움과 슬픔, 앞으로 엄마 없이 살아야 한다는 현실 부정 감정에 매몰되어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나와 앞으로의 현실을 알면서도 떠나야 했던 엄마는 그렇게 서로 아는 척하지 않고 라면 끓이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웠다. 물론 이제는 당시에 내가 배우고 도왔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음을 알지만 말이다.


차라리 '라면 끓이는 방법이 아닌, 수제비 끓이는 방법을 배워둘 걸'하고 아쉬워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별한 존재를 자주 떠올린다는 것은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메뉴판에서 수제비를 보게 되면 엄마가 생각난다. 이제 어느덧 부모님 이혼에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성인이 됐다. 나는 이별의 매움에 마음이 견딜 만큼 단단해졌고, 수제비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매운 수제비 주세요". 나는 수제비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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