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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Aug 19. 2024

장학금에 미쳐 여자친구와 헤어진 썰

28,074,560원. 이것은 대학교를 다니며 받은 장학금이다. 물론 여기에는 국가장학금도 포함이다. 국가장학금 제도의 목적은 소득 중에 등록금 비중이 높아서 부담되는 저소득층 재정지원이다. 졸업장으로 부의 대물림이 결정되는 현실에서 기회의 균등을 위한 지원 제도다. 지원받는 학생이 직전 학기에 최소한의 성적을 충족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에서 일정 비율을 감면받는다.


기초생활보장수급자를 제외하고는 소득 분위에 따라서 지원되고 소득 분위는 1 분위부터 9 분위까지 배정된다. 소득을 9단계로 나누어서 제일 소득이 많은 집은 9 분위, 제일 소득이 작은 집은 1 분위로 배정된다. 우리 집은 정서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가난했다. 따라서 2 분위에 해당하는 국가장학금을 받았다. 입학했던 2010년에는 지원 제도가 없어서 받지 못했지만, 남은 3년 동안 지원받은 국가장학금이 14,190,000원이었다.

ⓒ Lynn Kintziger of Unsplash. All right reserved.

나머지 1천4백여만 원 중, 6,976,000원은 근로장학금이다. 근로장학금은 장학재단에서 선정한 교내 근무처나 교외 기관에서 일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교내보다도 교외 시급이 더 높았으나, 교내 근무처가 인기가 많았다. 특히 도서관이 인기가 많았는데, 교내라서 수업 시간 사이에 근로를 짧게나마 끼워 넣을 수 있었던 데다가 맡은 일을 다 하면 조용해서 공부를 병행하기에도 좋았다. 나는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오랫동안 일을 했는데, 도서관에서 계속 일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근로장학생 선발에는 가난함의 증명은 기본이고, 높은 성적이 필요했다. 인기가 높은 도서관 근로는 전교에서 모든 지원자가 선호하는 곳이다. 경쟁률이 높다 보니 성적이 4점(평균 학점 A) 이상은 기본이었다. 도서관에서 일이 편해서라기보다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도서관 근로 장학생으로 계속된 선발이 절실했다. 왜냐하면 2 분위로 국가장학금을 받아도 남은 등록금은 납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 말고도 대학교를 다니던 연년생의 남동생이 있어서, 나의 등록금만이라도 집에 부담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모자라는 등록금 부분을 메우기 위해서는 별도의 성적 장학금이 필요했다. 성적 장학금과 근로장학생 선발을 위해 공부했고, 등록금 0원이 찍힌 청구서를 보며 안심하기를 반복했다. 대학 시절의 나는 장학금에 진정으로 미쳐 있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수업 시간이 아니면, 언제나 도서관에 있었다.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 Cassidy Rowell of Unsplash. All right reserved.

오죽했으면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와 연애도 도서관에서 하기를 원했다. 사실 연애랄 것도 없었다. 매일 도서관 열람실 옆 자리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연애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24살 복학생인 나는 20살 여자친구를 만나며 매일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기 원했다. 나라고 매일 도서관에서 틀어박혀 있는 것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장학금 말고는 없다고 여겼을 뿐이다.


20살이 되었을 때, 자유를 만끽하던 나의 과거는 까맣게 잊은 채 상대의 20살 자유는 배려하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졌던 이유도 이러한 다툼의 반복에서 기인한다. 시발점은 다른 것이었지만, 도서관에 묶어두려던 남자와 도서관을 탈출하려던 여자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결과가 언급하지 않았던 7백 여 만원의 장학금이다. 매 학기마다 필요했던 성적 장학금과 근로장학금만으로는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려고 대외 공모전을 사냥했다. 아마 학교 외에서 받은 장학금까지 하면 7백만 원이 훌쩍 넘을 것이다.

ⓒ Hamza Nouasria of Unsplash. All right reserved.

나는 실력 좋은 장학금 사냥꾼이었다. 여러 곳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면, 학과에서는 한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이 편중되지 않도록 여러 개의 장학금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나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면 개중에 액수가 가장 큰 것이 기준이었다. 누가 주는 것이고, 상의 품격은 어떤 것이 높고, 어떤 식으로 받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기 자랑을 이렇게나 길게 써 놓았냐며 나무랄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이 글은 가난의 선택권에 관한 것이다.


머리가 크면서 아버지의 고난을 알게 되면, 집에 손 벌리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온다. 나는 집에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해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곧바로 일을 해야 했다. 대학생이라는 4년의 시간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준비의 시간이었고, 나는 이를 최대한 저비용 고효율로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집에 손 안 벌리고 토익 공부는 문제집만 사서 2년 간 독학을 했고, 한국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서 2주간 잠 안 자고 EBS 무료 특강을 들었고, 여자친구와 연애마저도 도서관에서 무료로 했다. 경제적 가난은 기본적인 선택조차 앗아가고, 억척스럽게 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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