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시절, 식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일말의 여지없이 미술대 치즈 돈가스를 골랐다. 오죽했으면 스승의 날에 은사님을 뵈러 가거나, 모교에 재학생 대상 강연 요청을 받거나, 주말 졸업생 축구 모임으로 학교를 가면 미술대 식당이 열렸는지 확인한다. 단지 확인에서 그치지 않는다. 문이 열렸다면 이제는 학생이 아닐지라도 당당하게 치즈 돈가스를 키오스크로 주문한다. 이제는 오래 써서 뭉툭한 칼과 꼬챙이 부분이 숟가락만큼이나 큰 포크를 챙기고 창가에 자리 잡고 앉는다. 대학생 때 수백 번도 더 왔다 갔다 한 길을 바라본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은 없었고, 미술에 이루지 못한 열망 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고, 미술을 전공한 여자친구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미술대 치즈 돈가스를 먹고 싶었다. 반면 내가 다닌 학교 인근 '모듬 촌닭'이라는 가게가 유명했다. 닭 두 마리에 비빔 소면과 닭똥집까지 줬으니 주머니 얇고 한창 먹을 나이인 대학생에게 이보다 좋은 것은 단연코 없을 테다. 같은 대학교 학생에게 기억 남는 음식을 묻는다면, 대부분 촌닭을 이야기할 것이다. 공강 시간 잔디밭에서 친구나 선후배와 먹는 촌닭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 4년 간 먹은 촌닭은 한 손으로도 셀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좋아했던 것 치고는 미술대 치즈 돈가스도 그렇게 많이 먹지 못했다. 기억에 강렬히 남은 이유는 돈가스 소스가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그래서 덜 기름져 맛있던 것도 한 몫한다. 하지만 손에 닿을 듯이 닫지 않던 음식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도서관에서 미술대 건물이 가장 멀었다. 인문대도 식당이 있었지만, 차마 씹어 삼키지 못할 정도의 맛이었다. 나는 돈가스를 먹을 수 있는 이십 여 분의 여유 시간조차 없이 대학 시절을 보냈다.
2학년 때부터 복수 전공을 시작했다. 전공 수업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탓도 있겠지만, 나는 성적 장학금과 근로 장학금이 필요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수업과 도서관 근로, 공부만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시간이 꽉 찼다. 쉬는 시간 10분은 나에게 단지 이동 시간일 뿐이다. 그렇다 보니 학생 식당에서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하루 두 끼를 먹는데, 매 끼니 편의점 김밥 2줄과 삶은 계란 3개를 먹었다. 먹다 보면 퍽퍽한 것을 먹는 노하우도 생긴다. 비결은 탄산수다. 먹는 음식도 부실한데, 콜라는 건강을 더 해칠까 싶어서 탄산수를 마셨다.
부모님 이혼 후에 아침은 자연스레 먹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날 때 라면 끓이는 것을 가르쳐줬다. 하지만 매일 아침 식사를 라면으로 먹을 수는 없다. 배가 덜 고팠구나 생각할 수 있겠다. 다만 아침이 아니더라도 매일 라면 먹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라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항상 부대꼈고, 위장약 겔포스를 달고 살았다. 아마 사람에게 평생 먹을 수 있는 라면의 양이 있다면, 나는 이미 학생 시절에 평생의 라면을 다 먹은 듯하다.
따라서 대학생의 나에게 김밥과 계란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김밥과 계란은 수업 시간에도, 근로를 하면서도, 도서관에서도 먹을 수 있었다. 누군가 허락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도 피해가 되지 않도록 몰래 먹었다. 이렇게 시간을 겹쳐 쓰다 보니까, 남보다 같은 시간에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경제적 가난을 벗어났다 생각하지만, 지금도 길을 가면서 끼니 때울 때가 있다. 샌드 위치나 김밥은 길에 다니면서 먹기 좋다. 쓰레기도 약간의 비닐뿐이고, 주머니에 넣어 뒀다가 버리면 된다. 맛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2,300원은 미술대 치즈 돈가스 가격이었고, 4,700원은 김밥 2줄에 계란 3개와 탄산수 500ml의 가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 덕분에 매일 더 비싼 식비를 지출했다. 물론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서 시공간을 중첩해서 쓰며 아낀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이익이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잔디에 앉아 친구와 피크닉을 즐긴 경험도, 대학생이라 즐길 수 있는 광란의 축제도, 공강 시간 대학가에서 하염없이 보내는 젊음도 내게는 없었다. 미술대 치즈 돈가스 말고도 없는 것이 내게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