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확실히 써본 사람이 잘 쓰는 듯하다. 가난을 벗어났다 생각할 때쯤, 가난은 나에게 "평생 벗어날 생각 따위 하지 마."라고 속삭인다. 분주한 오후였다. 회의를 하고 나서 치우지 않은 컵이 생각나 설거지를 했다. 깨끗해진 책상이라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일회용 수저를 살뜰히 모아 사무실에 가져온 묶음이다. 친환경 시대에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고무줄이라도 훌륭한 포장이 되었을 테다. 하지만 내가 수저 묶음을 차곡차곡 모아둔 비닐에 영어로 상표명이 써져 있다. codes combine. innnerwear. 속옷이라고 뻔히 적혀 있으니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 내가 쓰려고 사무실에 가져다 둔 것이 아니다. 간혹 동료 직원이 컵라면 먹을 때, 수저가 없어 찾아다니던 것을 보고 가져다 뒀다. 심지어 속옷 라벨에 숨겨져 있어야 마땅할 '95'라는 사이즈가 포장지에 떡하니 있었고, 내 속옷 사이즈를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 되었다.
배달 음식은 거의 시켜 먹지 않아 일회용 수저가 생길 일이 없다. 간혹 친구가 놀러 와 시켰을 때 받은 수저였다. 하지만 그마저 차마 버리거나 일회용으로 쓰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뒀다. 어떻게든 쓸모를 찾으려 했다. 수저 모은 것은 넘어갈 수 있지만, 속옷 비닐마저 버리지 못한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항변할 방법이 없다. 누군가 성희롱으로 나를 신고한다면, 법정에서 "가난이 몸에 밴 것이 죄입니까?"라고 외쳐야 할 판이다. 나는 돈 쓰는 것도 잘 못하지만, 공짜로 받은 것조차 버리는 것이 쉽지 않다.
고기도 역시 구워본 사람이 잘 굽는다. 나는 고기를 잘 굽는다. 집에서 고기를 맛있게 굽기 위해 독일 주방명품 브랜드의 집게와 스테인리스 프라이팬도 샀다. 간혹 아버지를 집에 초대해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어렸을 때는 질리도록 LA 양념 갈비를 먹었지만, 이제는 아버지와 스테이크를 썬다. 그때 우리 집에는 포크나 칼이 없었다. 먹을 것 중에 고정해서 썰어 먹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했을 때, 가장 먼저 산 것이 다름 아닌 수저와 칼, 포크가 포함된 커트러리 세트다. 커트러리 세트는 영화에서나 보던 것이었고 나에게는 부의 상징과 같았다. 나는 포크와 칼로 스테이크를 썰 때면 마치 가난에서 벗어난 것처럼 느낀다. 아버지와 집에서 독일제 프라이팬으로 구운 스테이크를 커트러리 세트로 썰고 와인과 위스키도 마셨다. 하지만 스테이크를 얹은 접시와 다른 조리 도구는 다이소에서 산 것이다. 스테이크도 안심은 구워본 적이 없다. 내가 자주 먹는 부위는 힘 줄이 있어 스테이크로 선호도가 낮은 척아이롤이다.
내가 고기를 잘 굽는 이유도 고기 구워주는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 아들 같았는지, 고기를 구워주다 보면 손님이 쌈에 고기를 싸서 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나는 덤으로 주는 소주 한 잔까지도 거절 않고 넙죽 받아먹었다. 손님이 고기를 많이 남긴 경우는 일부러 늦게 치웠다. 여유가 생겼을 때, 이미 깔끔하지 않은 불판 위 고기를 깔끔하게 치우면서 먹은 적도 많았다. 김밥과 삶은 계란만 먹던 대학생 때, 훌륭한 단백질 원이었다.
확실히 아는 맛이 무섭다. 다만 나는 돈을 써본 적이 별로 없어서 돈의 맛을 잘 모른다. 지금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인터넷 쇼핑이다. 나는 대부분의 소비를 인터넷으로 한다. 식재료나 생필품은 마트의 배송 서비스를 이용하고, 책이나 취미에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거나, 기껏해야 전시나 뮤지컬 같은 지출이 내가 아는 돈의 맛 대부분이다. 문제는 최저가에 목맨다. 조금이라도 싸게 구매하기 위해 몇 시간이고 뒤적거린다.
이제는 나도 억대 자산가인 동시에 시급도 적지 않다. 하지만 고작 몇 천 원 할인이나 최저가 경쟁에 나의 모든 능력을 동원한다. 할인되는 돈 몇 배나 되는 내 시간을 소모한다. 나는 명확히 안다. 단지 몇 만 원 싸다고 해도, 몇 시간을 쓰면 나에게 이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검색한다. 나는 돈의 맛을 전혀 모른다.
누군가는 가난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할 테다. 하지만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나의 비합리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난은 의지로 극복할 수가 없고,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 빈곤은 극복했을지 모르지만, 정서적 빈곤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