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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Jun 07. 2024

아버지의 여자친구를 반대했다.

"재용아, 엄마 만들어 줄까?". 아버지가 나에게 물었다. 동생이 아니라, 엄마를 만든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잘못 물은 것이 아니다. 질문에 답을 해야 하던 나에게도 이상한 질문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 집 상황에는 엄마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나에게 생물학적인 엄마는 존재하지만, 법적인 엄마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부모님 이혼으로 내가 10살 때, 어머니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양립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 사건은 양자역학과 같이 나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을 받았던 중학생 때 이미 어머니는 나를 떠난 후였지만, 나는 아직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듯하다. 부모님의 이혼은 나에게 선택권이 없는 헤어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새엄마'라는 사건은 나에게 선택권이 존재했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았을 때 내가 했던 답이 온전하게 다행이었는지 여전히 판단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짧게 고민하고 답을 내릴만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새엄마 이야기를 듣자마자 열렬히 반대했다.


어머니가 두 명이 된다는 것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영유아 시절의 일이라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미 어머니가 있었음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10살의 나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나는 새엄마를 반대함으로써, 나를 낳아준 엄마를 '헌 엄마'라는 수식어로부터 지켜냈다.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나의 정체성 혼란을 막기 위한 자기 방어가 더 컸다.

ⓒ Marco Bianchetti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나는 그 질문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성장기를 지나 서른이 넘어서까지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했다. 아버지가 혼자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할 때면 우리 집 사정을 아는 친구에게 물었다. 간혹 이혼 가정에서 자란 사람을 만나도 똑같이 물었다. "아버지의 여자친구를 반대했던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아마 내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 옳지 않았음을 언제나 재확인할 뿐이다. 내가 인정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아버지는 나와 동생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스스로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성인인 동시에 남자다. 다만 십여 년을 쌓아온 가족이라는 복잡 미묘한 관계에 얽매여 나에게 선택을 양보했던 것뿐이다. 아버지라고 해서 그 질문을 나에게 묻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마저 헤아릴 여유가 없던 나의 정서적 가난은 반대라는 결정을 전하면서 아버지에게는 두 번의 아픔을 남겼을 테다. 나와 아버지 모두 웃지 못하고, 서로 아픔만을 나눠 가졌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나에게 새엄마를 언급한 적이 없다. 어쩌면 다시는 묻지 못할 만큼의 상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픔은 이혼이라는 사건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와 동생에게 어머니 상실은, 아버지에게 남성과 여성의 역할 모두를 혼자서 짊어지도록 했다. 아버지는 이를 자신의 책무인 양 겸허히 받아들였고, 자신의 남성성을 포기했다.

ⓒ Marco Bianchetti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가난의 다양한 형태 중에 정서적 가난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로 구성된 3~4인의 '정상가족'이라는 인식이 현재보다 압도적이던 때, 우리 집은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비정상 가족'에 속했다. 다시금 정상가족의 틀 안에서 존재하려고 노력했던 아버지의 질문은 최초의 정상가족을 지키려 했던 나의 반대에 비정상가족으로 남아야 했지만 말이다.


나는 아버지 여자친구를 반대했다. 하지만 이혼이 '비정상 가족'이 아니게 된 현재에는 다른 조건이 달라진 것이 없음에도 아버지 여자친구를 반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사회 인식이나 시대적 배경에 따라서 정서적 가난은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중첩적인 것이 된다. 이처럼 드러나지 않는 정서적 가난은 합리적 선택을 방해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 여자친구를 반대했던 것처럼.


'비정상 가족'이 만연한 현재, 이혼 가정의 아픔이 적을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로 떡하니 자리 잡는다고 한다. 오히려 이혼 가정이 많아져서 흔할수록 아픔을 겪는 사람의 진솔한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회 구성원 간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 사회문제일까. '비정상 가족'의 다양한 형태를 존중하는 것만큼 함께 살펴야 하는 것은 정서적인 가난을 경험하는 사람의 아픔도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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