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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포터 Mar 10. 2021

남의 직장이 더 커 보이는 법

나를 잡아먹은 '그' 열등감에 대하여

 참으로 신기하지.
항상 내 손에 있는 것보다 남의 손에 있는 떡이 더 맛있어 보이니.

 열등감으로 점철된 나를 오도카니 바라봤던 적이 있다. 왜 이렇게 남의 것을 탐내고 있는 걸까. 항상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은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것일까. 그 해답이 나오기까지 2주 정도가 소요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주 동안 했던 고민에 대해 말하기 전, 내가 그 고민을 갖게 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것은 작년 5월, 약 1년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긴 연휴를 맞이하여 오랜만에 J 언니를 만났다. J 언니와의 인연은 조금 신기한데, 우리는 외부 동호회에서 딱 한 번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 사이였다. 물론 온라인으로 몇 번 대화를 나눈 적 있지만, 언니가 동호회를 그만두면서 언니와 연락이 끊어진 채 2년이란 시간이 흘렀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일본 취업 박람회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실제로 얼굴을 본 건 딱 한 번이고 서로의 기억은 이미 2년 전에 끊겨 있을 터였는데도 서로 얼굴을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날을 계기로 언니와는 주기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5월에 만나게 된 것도 그 연락 속에서 맺어진 약속이었다. 이때 나는 일본 회사 입사일이 도래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던 시기였다. 혼자서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회사에서는 주기적으로 본사 직원과 한국인 입사자들과의 간담회 자리를 마련해서 간간히 소통만을 유지하고 있던, 입사 예정자의 신분이었다.


 J 언니는 사정이 달랐다. 나와 마찬가지로 일본 취업을 준비했고, 일본에 입국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처지였으나 이미 언니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그건 회사가 언니 사정을 고려해준 결과로, 한국에 있으면서도 본 업무에 투입될 수 있었다. 대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며 이제는 흔해진 재택근무 덕택이었다. (물론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가 다르다는 데에 큰 특징이 있었지만, 재택근무에 있어서 그건 큰 문제가 아니다.)


 언니가 회사 이야기를 재잘거릴 때 나는 평이하게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럼 그건 어떻게 된 거야?” 줄기차게 이어지는 내 질문에도 언니는 불편한 기색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동경했다.


 언니를 동경하는 마음이 앞서 내 처치가 보잘것없다고 느꼈다. 


 “언니가 정말 부러워. 나도 빨리 회사원이 되고 싶은데.”


 “백수가 좋은 거야. 나는 다시 백수가 되고 싶어.”


 언니의 대답은 나의 자존감을 좀먹는데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 나도 내가 지금 백수가 되고 싶어서 백수인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백수라고 칭하면 주변에서는 '그건 백수가 아니야!' 라고 반박하곤 했다. 왜냐면 이미 나에게는 직장이 있지만 불가피한 문제로 일을 못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런데도 나는 나를 백수라 칭했다. 실수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다. 나도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입버릇과도 같은 소리를 입에 달고 살고 싶었다. 업무의 부담감에 짓눌려 겪게 되는 스트레스가 갖고 싶었다. 나도 그때가 좋았지, 라며 세월을 다 살아본 늙은이처럼 백수였던 시절을 꿈처럼 읊조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에게 내가 언니의 현 상황을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건 나의 자존심과 큰 연결고리로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언니가 입사한 회사는 내가 포기한 회사였다. 앞서 말했듯 언니와는 일본 채용 박람회에서 마주쳤다. 신기하게도 나와 언니는 같은 회사에 지원했고 결과적으로 같이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나와 언니 외의 다른 동기분과도 만날 수 있었는데, 이분은 O 언니라고 칭하겠다.) 


 하지만 이때 내 근자감은 하늘을 찌를 때였다. 이보다 더 크고 좋은 직장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합격 거절 연락을 보냈다. (이 때 여담이 있는데, 내가 이 회사에 처음 거절 연락을 보냈을 때 회사는 내 거절을 거절했다. 나는 또 거절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회사는 나를 5번이나 붙잡았었다.) 동기 중 그 회사를 그만둔 건 나 혼자뿐이었다. (이 선택을 후회한 것은 포기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 지금 언니가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은 내 것이 될지도 모를 것들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나도 같은 길을 걷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짧은 생각과 자만심이 이 결과를 초래했다. 백수인지 아닌지 모를 어중이떠중이 위치를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는 내가 택한 것이고, 언니가 가고 있는 그 길은 내가 내 손으로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부러워. 나는 지금 이 선택이 싫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얄팍하더라도 내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나의 이런 속내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던 때는 작년 10월, 내가 일본 취직을 포기했을 무렵이었다. J 언니와 O 언니와 셋이서 랜선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일본이 한국인 입국을 허가하기 시작하면서 언니들이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어찌어찌 연락이 되어 (이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셋이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가졌다. 약간의 술기운에 그동안 갖고 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실 나는 그 기업을 포기한 걸 엄청 많이 후회했어.
그래서 그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언니들이 너무 부러웠어.”


 이 말을 덤덤히 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인지. 언니들에게 이 말을 하기 2~3개월 전에 감정 조절이 전혀 되지 않던 때가 있었다. 하루에 12번도 넘게 감정이 널뛰고 언니들이 간 기업을 가지 않은 나의 선택을 후회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불안했다. 몇 번이고 우울감이 나를 지배했다.


 감정에 휩싸이는 자신의 모습을 경멸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나에게 되물었다.


 내가 왜 지금 이렇게 감정적으로 힘든 것인가. 애초에 왜 나는 그 회사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별로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결과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 기업에 애착이 생긴 건가? 애착이 생긴 거라면 왜 생긴 거지? 애초에 애착을 갖게 된 본질에 가까운 계기가 무엇이었던 거지? 질문을 되뇌기 시작한 지 2주가 지났을 무렵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하나는 나는 내게 없는 것을 동경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가지 않은 선택지의 말로를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같은 일본 취업을 했음에도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언니들이 부러웠다. 더 정확하게는 한 달 꼬박 일해 월급을 타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를 수행하는 그 행위를 하는 언니들이 부러웠다. 


 게다가 나는 이 회사뿐만 아니라 여러 곳의 회사에 합격 거절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유독 이 회사에 집착했던 이유는 이 회사만이 내가 택하지 않은 선택지의 결과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들은 해외 입국자들에게 어떤 대처를 했는지 알지 못한다. 코로나로 입국이 폐쇄되기 전에 입국을 시켰는지, 나처럼 입사 대기인 상황인 건지, 언니들처럼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인 건지 아니면 제3의 상황인 건지 정보가 없었다. (내가 가지 않은 회사 중, 지인이 있는 곳은 언니들이 다니고 있는 그 회사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기업들의 대처 방안에 대해서 추측은 가능하지만 실제 상황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니들과 주기적으로 소통하면서 나는 의도치 않게 그 회사에서 언니들이 받고 있는 대우를 전해 듣게 된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선택지의 답을 안다는  참으로 잔인한 일이었다.


 언니들이 다니고 있는 회사를 꿈꿨던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가진 언니들의 처지를 부러워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되었다고 해서 내 감정이 하루아침에 진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성적으로는 판단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었다. 인정하자. 내가 언니들에게 어떤 부분을 질투했던 것인지. 끝난 일들을 지금으로 끄집어오는 사고를 멈추자.  


 깊이 생각한 덕택에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산뜻해졌다. 그럼에도 미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반작용이 되어 내게 없는 것을 어떻게 하면 채울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언니들한테 느꼈던 어떠한 열등감과 질투심이 굉장히 많이 사그라든 상태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때는 이미 앞서 말했듯이 일본 회사를 그만둔 직후였기에 후련한 기분이었던 덕택도 있다.)




 지금 언니들은 11월에 일본에 입국해 지금까지 회사에 잘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벌써 어느덧 언니들은 2년 차인데, 아직 인턴 자리에 머물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새삼 언니들이 사회인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요즘도 가끔 언니들과 함께 같은 회사에 다니는 모습을 그려보고는 하지만 그건 정말 거기까지로, 다행히도 그 외 어떤 질투도 느끼지 않는다.


 스쳐 가는 말로는 언니들도 언니들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외에서 일한다는 그 자체도 그랬을 것이고 일본에 입국하지 못한다면 잘리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같이 있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 고민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은 채 형태에만 고지식하게 굴었던 내 속앓이를 반성한다. 


 나는 남의 떡을 너무도 탐냈지만 사실 나는 남이 가진 떡 그 자체보다 남이 그 떡을 갖고 있다는 그 모습을 부러워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떡을 탐을 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눈 비비고 다시 그 떡을 보니 그렇게 바랐던 그 행위조차 감흥이 없어졌다.


 잊지 말자. 남의 직장이 더 커 보이는 법. 본능적으로 열등감에 휩싸여 다시 남의 것을 탐할 때면 왜 탐하는지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생각보다 그 열등감에서 빠져나올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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