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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린 May 10. 2021

어느 빈티지 애호가의 아틀리에

사랑이 부족할 때 겪는 말실수

나는 오래된 물건을 좋아한다.

몇십 년 지난 낡은 것이

아직 버려지지 않고 누군가에게 팔린다는 것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아껴진

귀한 물건 임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이런 것들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1930년대 미국에서 생산된 Corona Standard 타자기.

2차 대전 때인 1944년에 미군에 납품된 1626 진공관.

60-70년대 미국 Tensor 데스크 램프.

70-80년대 핀란드 Arabia Finland 접시, 찻잔과 포트.

80년대 미국 JBL 4425 스피커.


최근에 나는 1950년대에 서독에서 생산된

작은 진공관 증폭 라디오 하나를 갖기 원했다.

두어 달 지켜보다가 적당한 놈을 하나 찾아 구매했다.

몇 시간 만져보니 기본적인 점검과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라디오 애호가들에게 정평이 난 전문가의 작업실이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연락을 드리고

라디오를 가져갔다.


그가 취미로 시작한 라디오 수집과 수리는

중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자

이제는 부업이 아닌 본업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아틀리에는 여러 전기 계측기와 부품들로 즐비했고

이따금씩 납땜으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백열등을 타고 올라가며 형태를 뚜렷이 할 때

제법 고상하고 우아한 정경을 만들어 냈다.

그 옆에 마련된 창고에는 박물관의 한 섹션을

채울 만큼의 컬렉션들로 가득했다.

디터 람스(Dieter Rams, 1932~)가 디자인한

브라운(Braun)몸값 높은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디터 람스 디자인팀의 Braun 라디오 & 레코드 플레이어


여러 나라에서 이곳으로 모이는 수집의 대상들

전국 각지에서 이곳으로 모이는 수리의 대상들로

느껴지는 활기는 이곳이 외진 곳에

혼자 계신 곳이라는 생각을 잊게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이러한 삶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 아닌가.


수집을 목적으로 한 물건이지만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판매한다고 하셔서

이것저것 보여달라고 말씀드렸다.

선반에서 라디오를 하나씩 내려다가 자식 자랑하듯

제조사와 생산시기 및 주요 스펙들을 알려주신 후

전원을 넣고 주파수가 추어지면 볼륨을 높이시며

설명을 이어가셨는데 자신이 직접 오버홀(overhaul)

작업을 한 물건이다 보니 하나하나에 애착이 느껴졌다.

그중에 하나가 마음에 들었는데 흔치 않은 모델이었고

생산된 지 66년이나 지났음에도 금색 도금은 빛이 났다.

꽤 공을 들여 복원을 하고 광택까지 낸 것이라고 하셨다.

구매할 수 있냐고 여쭈었더니 원하는 분이 있으면

요즘에는 미련 없이 팔아버린다고 하셨다.

66년된 그 라디오


라디오 하나를 고치러 갔다가 집에 오니 두 개가 되었다.

새로 산 라디오에 외부 입력을 넣었는데

노이즈가 너무 심해서 연락을 드렸다.

미리 테스트를 해서 드릴 걸 그랬다며

수고롭지만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

왕복 한 시간 거리의 그곳에 다시 갔다.

다행히 고장은 아니었고 접지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해결했다.

다시 집으로 와서 주파수 다이얼을 조정하다 보니

이번에는 다이얼이 헛돌았다.

또 연락을 드렸더니 죄송하지만 한 번 더 오라고 하셨다.

좀 더 가지고 놀다 보니 이번에는

전원 노브가 고장 나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어제의 선택에 후회가 밀려왔다.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이 놈한테 정이 좀 떨어져서요. 환불을 해주시면 안 될까요? 큰 고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고친다고 해도 다른 사람한테 가는 게 낫겠습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언제 가져오세요. 환불해 드릴게요."


며칠 후에 다시 찾아갔다.

환불을 받으려니 좀 죄송한 마음도 있고 해서

달콤한 디저트라도 하나 사서 갈까 했다가

적당한 것이 생각이 안 났고

뭘 좋아하실지도 몰라서 빈 손으로 갔다.

이런 오래된 물건은 원래 고장이 잦다면서

수리를 받는 과정까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내 기분 탓인지 몰라도

그의 말투에서 차가움이 느껴졌다.

환불된 금액은 다시 통장에 찍혔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 가지고 있던 라디오는

다른 문제로 또 수리를 맡겼다.


나의 빈티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저 이쁘고 상태 좋은 놈을 소유하려 했을 뿐

그 오래된 물건에 대해 너그럽지 못했다.

사물에 대해 '정이 떨어졌다.'는 표현을 하면서도

그 사물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분과 연관 짓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그 사물의 존재를 66년 동안의 시간과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상상해보게 되었다.

1955년 서독 베스트팔렌의 어느 공장에서

끼워지는 부품들과 직공들의 분주한 손들.

어느 가정의 나른한 공기를 깨웠던 독일 말 뉴스 소리.

매일 먼지를 털며 아껴 주었던 주인.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밀려나 어느 중고 매장의

선반 위에서 쌓여가는 먼지.

늙어가는 수리공의 정성으로

우리말 FM이 깨끗하게 잡힐 때

노화로 찾아온 자신의 이명이

고쳐지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시간 속에서 대상들의 존재와 연관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자

사물과 사람에 대한 보다 넓은 아량과 사랑이 느껴졌다.

그날 저녁에 메시지를 썼다.

"여태 빈티지 물건들을 대할 때 저에게 주는 현재의 가치만 따졌지 그것이 버텨온 세월과 그동안 아껴준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없었네요. 제가 눈이 침침해져 가는데 누가 눈이 고장 났다고 '정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한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날 오후가 되어 문자가 왔다.

"심성이 부드러우신 분이로군요. 라디오 수리는 완료하였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주말이 돌아와 라디오를 찾으러 갔다.

이번에는 미소로 맞이해 주셨다.

고친 라디오를 점검하면서 이런저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오기 직전에도 손님 한 분이 떠나셨는데

또 다른 손님이 오셨다.

토요일에 오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셨다.

바빠지실 듯하여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경쾌한 기분이 드는 토요일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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