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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임휴직을 신청하다.

난임 휴직 절차

by 온 아무

휴직 직전의 학기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에 나는 평소보다 좀 더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짬을 내어 1월부터 새로운 병원에 다녔지만, 휴직을 위한 진단서를 요청했을 때 난임 사유가 '원인 불명'이었기에 몇 차례의 진료 기록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자궁난관조영술**(HSG)도 새로운 병원에서 다시 받거나, 이전 병원의 기록을 전달해야만 진단서 발급이 가능했다. 방학 전까지 서류를 제출해 달라는 교감선생님의 요청에 마음이 급했다.

자궁난관 조영술**(HSG)

검사 목적: 자궁과 나팔관의 구조적 이상 유무 확인 (막힘 여부, 형태 이상 등)
검사 방법: 조영제(조영 물질)를 자궁 내에 주입한 후, X-ray(방사선 촬영)를 통해 조영제의 이동 경로를 영상으로 확인
검사 시간: 약 10분 내외 (준비 및 회복 포함 시 30분 내외)
통증 여부: 개인차가 큼. 생리통이 심한 경우, 통증이 강하게 느껴질 수 있음
결과 활용: 시험관 시술(IVF) 등 난임 치료에 앞서 자궁·나팔관의 상태를 진단하고 치료 방향 설정에 활용, 진단서 발급을 위한 절차에 필요하기도 함.


일련의 과정을 다시 반복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진 않았다. 그래서 학교와 새로운 병원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전에 다니던 병원에 요청했다. 일부 서류는 온라인 발급도 가능했지만, 시술 영상 같은 중요한 자료는 병원 정책에 따라 직접 방문을 해야만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난임휴직을 낼 수 있었다. 동료들은 응원의 말과 함께 아이 없이 쉬는 삶이 부럽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휴직이 기쁘지만은 않았다.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학교를 떠나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엄마로서의 나보다는, 교사로서의 내가 더 익숙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아이 없이 누리는 안락한 휴식이기보다는, 끝없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겨내야 했던 시간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난임휴직은 굉장히 큰 혜택이다. 공무원에게 난임휴직은 아이당 최대 2년이 주어진다. 첫 해에는 수당을 제외한 본봉의 70%가, 두 번째 해에는 50%가 나온다. 국가에서 시술비를 일부 지원하더라도 월급의 많은 부분이 시험관 시술비로 나가야 했기에 무급이었다면 부담이 훨씬 컸을 것이다. 처음부터 '1년을 낼까?' 싶기도 했지만 6개월을 택했다.


6개월을 택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1년 휴직을 하면 내야 할 서류인 휴직원, 진단서 외에도 '서약서'가 추가되는 게 마음에 걸렸다. 복직 후 지금 학교에 나를 위한 자리가 남아있지 않아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만 했다. 1년 휴직을 고민하며 서약서를 작성하려다 억지로 반성문을 쓰고 있는 아이처럼 심통이 났다.


다른 하나는 난임휴직만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휴직 초반에 임신을 하는 경우, '휴직사유 소멸 시 즉시 복귀 원칙'에 따라 바로 복직을 해야 했다. 복직을 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였지만, 동료교사들을 통해 내가 들었던 현실은 달랐다. 임신사실을 학교에 말하며 복직 의사를 밝혀도, 많은 관리자들은 난색을 표하며 산전휴직**(육아휴직의 일부를 출산 전 휴직으로 끌어오는 제도) 쓰기를 권했다고 했다.


"선생님, 기간제 교사의 근무도 보장해 줘야..."



누군가는 그럼에도 복직을 선택했고,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산전휴직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세상일이 무 자르듯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휴직을 쓰는 입장에서는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6개월 휴직의 경우 초반에 임신을 해도 몇 개월 더 아이를 돌볼 수 있지만, 1년 휴직을 낸 상태에서 초반에 임신을 하면, 육아휴직 기간을 온전히 활용할 수 없게 되는 셈이었다.


출산 후 양가 부모님의 도움이 어려운 나에게는 아이를 온전히 더 돌볼 수 있는 몇 개월이 아쉽게만 느껴졌다. 교사의 권리와 기간제 교사의 고용 보장 사이에는 ‘내 아이를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키우고 싶다’는 보호자로서의 마음도 자라나고 있었다.


이후 1월에 출근할 때는 오전 캠프가 끝나고 나면 교실 이사를 위해 짐을 쌌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에는 두 지역에 있는 병원을 오가며 각종 피검사와 임신 관련 예방 접종을 하거나, 시험관 시술에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했다. 온라인으로 난임 관련 정보도 찾아보고, 보건소에 난임결정 지원통지서도 신청했다. 그 사이 시도한 자연주기는 별다른 기대도 없었고, 성과도 없었다.


본격적으로 시험관 시술을 하기 위해 2월에 병원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 원장님으로부터 이번 주기에는 시험관 시술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2월에 나의 생체 시계에 따른 시험관 일정과 긴 설 연휴로 인한 휴진일이 겹쳤다. 병원을 선택할 때 '공휴일 운영 여부'도 고려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그때 들었다.


그래도 당시엔 실망감이 크지 않았다. '3월부터 시도하면 되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기도 했고, 시험관 시술만 하면 아이가 당장 생길 것만 같았다. 바로 임신이 되어버리면 남아있는 난임휴직 기간을 산전휴직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 더 걱정되기도 했다.







"언제 제 차례가 올까요?"



병원 안내데스크에서 누군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질문을 했다. 세련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이 진료 이후의 목적지가 집이 아닌 것 같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그녀는 초조해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부장님, 정말 죄송하지만... 시간을 늦출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이후 그녀는 연신 허공에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서 얼굴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난임 휴직제도가 있어도 휴직을 쓰기까지 부담이 있는데, 이러한 제도가 없거나, 있어도 사용하지 못한 채 난임 병원을 다니고 있는 직장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망설이다 안내데스크에 가서 직원분께 말을 건넸다.


"혹시 저 분 차례랑 제 차례를 바꿀 수도 있나요?"


문득 그렇게 하고 싶었다. 병원 진료 이후 별다른 일정이 없기도 했고, 착한 일 하면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몇 명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그분은 연신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축복의 말도 건넸다. 금방 예쁜 아기 천사가 찾아올 거라고. 그 말을 들으며 나도 그럴 것 같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3월에는 병원 휴진 일이 많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시험관 과정은 시작하고 싶다고 해서 시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속-


[당분간 월, 목요일 업데이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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