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어른들끼리도 대화가 필요해
나는 어렸을 적 편식이 심했다. 정확히는 편식보다는 소식에 가까웠다. 초코파이 하나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쪼개 먹다가 가족의 발에 압사된 채 발견될 때면, 초코향 가득한 꾸지람을 듣곤 했다.
다른 아이들이 좋아한다던 라면, 소시지 등도 먹지 않았는데, 참다못한 엄마가 "음식 남기면 지옥 가서 남긴 것 다 먹어야 해!" 라며 협박하셨다.
그런 엄마의 협박에 질세라 '그럼 맛있는 반찬도 조금씩 남겨야지.'라며 고기반찬까지 남기는 역발상을 실천했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걸 우리 엄마가 알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나의 편식은 발령이 난 뒤에서야 점차 줄어들었다. 초딩 입맛인 내 기준에 요즘 학교 급식은 참 잘 나온다. 학교로 들어오는 식자재는 원산지, 신선도 등 기준이 높기도 하고 들어와서도 위생적으로도 관리가 잘 된다. 무엇보다도 직장인의 꽃은 밥 아닌가!? 매일 식판 왼쪽 상단에 놓이는 간식은, 나에게 있어 전쟁과도 같은 직장생활의 공로를 인정해주는 왼쪽 가슴에 패용되는 훈장과도 같달까.
가끔 어떤 학생들은 "왜 선생님은 맛있는 거 많이 받아요?!"라고 말하면, 전직 편식 어린이 출신인 나로서는
'아닌데! 맛없는 것도 많이 주셨는데!'라며 반박하고 싶을 때도 있다.
초등학교는 자율배식이 아니라서 담임교사도 아이들과 함께 급식을 배식받는다. 배식받는 양은 배식받는 사람의 피지컬+조리사님과의 친분에 영향을 받는다. 1학년 아이들 기준에선 내가 많이 받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피지컬이 좋은 편은 아니라 내 급식량은 정규분포표에서 중앙값 근처에 머무르고 있다.
조리사님의 배식량을 관찰해 보면,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학생을 제외하고는 잔반 처리 이슈로 인해 처음부터 넉넉하게 주시진 않는다. 그래도 대부분은 더 달라고 하면 충분히 더 받을 수 있다. 간혹 업체의 배송실수로 인한 식자재 부족, 조리사님의 배식량 조절 실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영양사님이 예산안에서 머리를 쥐어뜯어가시며 넉넉히 주문해 주시기 때문에 그런 일은 거의 없다. (자고로 먹을 거 주는 사람이 최고임.
물론 급식 제한이 있는 경우도 있다. 학교 신체검사 이후 비만도를 관리하거나, 건강 관련 사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어서 '일부'학생들에게는 두 번째 식판부터 제한이 생기기도 한다. 때로는 맛있는 반찬만 쏙 빼먹고 방문한 학생에게 "이 반찬들도 먹고 오면 좀 더 줄게."와 같은 조리사님의 조건부 약속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급식 중 나오는 간식은 교사인 나에게는 훈장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볼모로 잡을 수 있어서 항상 밥을 먼저 먹고 난 뒤 먹을 수 있도록 하는 아이템이다. 담임의 급식지도에 부스터를 달기 위해 영양사님이 붙여 놓은 "잔반을 남기지 않은 환경 지킴이" 도장판도 있지만, 도장판 따위에 꿈쩍하지 않는 편식좌도 언제나 한 두 명씩 존재한다.
나는 그런 어린이들에게 편식좌 선배로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든 몇 가지 규칙이 있다.
1. 먹기 싫은 반찬 중 정말 싫어하는 한 종류는 거절하기
처음에는 "정말 먹기 싫은 반찬은 주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거절하도록 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때만 해도 '밥을 먹으려면 반찬을 조금이라도 먹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떤 학생이 반찬 수령을 전부 거부한 뒤로 이 세상에는 '밥'만 먹는 학생도 존재한다는 것 알게 되었다. 이후로 반찬만 먹겠다는 녀석, 간식만 먹겠다는 녀석, 흰쌀밥이 아니면 안 먹는 녀석 등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게 되며, 먹기 싫은 반찬 중 하나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규칙으로 변경했다.
2. 받은 반찬은 한 입 이상 꼭 먹어보기
세 가지를 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한 가지만 거절하게 했으니 편식이 심한 학생은 잔뜩 풀이 죽은 채 자리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배식받은 반찬에 대한 예의로 '받은 반찬은 한 입 이상 꼭 먹어보기' 규칙이 있다. 아이들에게 멋진 작품을 만들었을 때, 다른 사람이 별로라고 하면 기분이 어떤지 생각해보게 한 뒤, 급식실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요리는 그분들이 만든 작품이며, 많은 노력이 들어감에 대해 교육한다. 그렇게 급식 교육을 하고 나면 우리반 편식좌들은
1) 오만상을 찌푸리며,
2) 나물의 가장 끝부분을 젓가락으로 집도한 뒤,
3) 코로 냄새를 맡아 위험을 감지하고,
4)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5) 코를 막고 입에 털어 넣은 뒤,
6) 씹는 둥 마는 둥 질겅이다가,
7) 물을 꿀떡꿀떡 삼키는 먹방을 나에게 보여준다.
그 먹방vlog를 1m 앞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른들이 어릴 적 나에게 "그렇게 먹으면 오던 복도 달아나겠다."라며 혀를 차셨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한 입씩 먹어보게 하면, "어? 맛있다."라며 먹는 아이들도 생기고, 자기가 받은 반찬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것도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나 진짜 반성해라)
내가 근무하던 큰 학교에서는 빠른 회전을 위해 매번 앉는 자리가 변경돼서, 교사는 1학년 꼬꼬마들이 미아가 되지 않도록 학생들의 급식 자리를 매일 안내하고 있다.
그날도 급식실에서 식판을 받은 아이들에게 앉아야 할 자리를 안내하고 있는데, 배식하는 곳에서 원준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원준이는 조리사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원준이 뒤로는 길게 급식줄이 밀려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무슨 일일까요?"
"아, 이거 먹기 싫다고 해서 조금만 먹어보라고 했더니, 안 받는다고 우네."
원준이는 씩씩거리며 "반찬 하나는 안 받아도 되는데, 자꾸 조금만 먹어보라고 하잖아요!" 소리쳤다.
나는 우선 그 반찬은 남겨도 된다며 자리에 앉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학생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원준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조리사님께 선생님이 미처 얘기를 드리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원준이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규칙이 달라질 땐 앞에 계신 어른의 말을 따른 뒤 선생님에게 와서 설명해 주면 된다고도 얘기했다. 단, 조리사님의 원준이의 건강을 위한 마음이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예의 없이 소리 지른 부분은 잘못되었으니 함께 사과드리러 가자고 말씀드렸다.
원준이의 손을 잡고 조리사님께 같이 사과를 드리며 생각했다. 어른들끼리도 사전에 대화가 필요했음을, 어른들의 저마다 다른 기준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는 것을.
추신: 급식 파업이 하루빨리 마무리되어 아이들의 식탁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란다. 더 나은 처우가 필요하다는 절박함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아이들을 중심에 둔 일만큼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