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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은진 Oct 11. 2023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사는 것 같아도

이루지 못한 꿈도 있었습니다



"좋아하는 글을 쓰기 위해 자퇴를 했어요. 지금은 대학을 다니며 작가 활동을 하고 있고요."

"와, 대단하시네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게 부러워요."



흔하게 듣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업으로 하며 살아가는 게 부러운 인생이라니, 이런 걸 보면 삶은 참 부당한 것 같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선택조차 내 의지로 할 수 없으니까요.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모두가 행복한 게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그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돈은 못 벌어요. 먹고 살 일은 별개로 찾아봐야 해요."



지금까지는 대학생이라는 일종의 방어전선 아래 작가 활동을 겸직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핑곗거리도 내년이면 효력을 잃게 되었어요. 졸업 후에는 취업이라는 가장 큰 문턱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한 우물도 10년은 파야한다는 말이 있으니 작가로서의 길을 포기하지는 않을 거지만,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까지 안고 가야 할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결국 쓰고 싶은 글 쓰고, 책도 내 봤고, 그러면 된 거 아니냐!



사실은요, 제가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사는 것 같아도 이루지 못한 꿈도 있었답니다. 문학을 넘어선 문화예술 장르 중에서도 연극예술에 대한 의지도 있었거든요. 중학교 시절 3년의 청춘을 다 바쳤던 연극부 동아리 시절, 단 한 번의 무대를 위해 수십 차례 진행한 연습과 저녁, 주말까지 이어졌던 꾸준한 열기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시큰거립니다. 십 대의 순수한 열정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던 일이거든요.




소극장과 강당은 제게 최고의 무대였죠. (Unsplash, Sonder Quest)








허드렛일을 하던 막내 시절부터 시작해 올라온 연극부장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더군요. 텅 비어버린 부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발로 뛰고, 2학년을 견제하는 선배들의 비위를 맞추며 연습하고, 대회에 내보낼 시나리오는 유치하지 않으면서 공감 가는 소재를 찾아야 했으며 무대에 오르고 싶어도 부족한 인력을 채우기 위해 조명과 음향을 번갈아가며 손봐주는 등 몸이 최소 두 개는 필요했습니다.



갈등도 많았고 스트레스도 많았죠. 그런데 추억은 미화된다고, 돌아보면 부원들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르는 거예요. 저녁까지 무대를 위해 연기 연습하는 학생들을 위해 사비일 게 분명한 돈으로 피자를 사다주신 담당 선생님, 주말에도 학교로 나와 지하 주차장에서 연습하며 춥다고 발을 동동 굴리던 우리, 사방에 공이 날아다니는 강당 무대 뒤에서 다른 아이들이 다 듣도록 큰 목소리로 대사를 연습했죠. 그렇게 나간 무대에서 상을 받기도 하고, 대상이 아니라 아쉽기도 했고, 축제 때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며 일주일 정도 허황된 인기에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했고요.



그 시간을 거치며 저는 연극 배우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연기 강습을 지도해주던 선생님의 극단에 찾아가 연습하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하는 등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었죠. 제 모습이 퍽 진지해 보였는지, 지도 선생님께서는 중학교 3학년에게는 너무 잔인한 연극계의 현실을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어린 날 겁을 먹었던 저는 고등학교 생활, 극단 생활을 병행하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 극단에 가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 걸, 고등학교를 자퇴해버렸으니 그냥 도전해 볼 걸 그랬나요?



사실 경제적 여유도 포기하는 데에 크게 한 몫 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진로탐색이 왕성하던 시기, 모 예술원이나 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진로 체험도 쏘다녔거든요. 고작 일일 체험이었지만 꿈을 가진 친구들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하게 모였고 교수님들은 이름만 대면 아는 스타나 유명인도 속해 있었습니다. 화려한 겉모습에 넘어가는 건 너무 쉬웠지만 지불해야 할 대가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입시나 오디션을 거쳐야만 갈 수 있는 커다란 무대가 아니더라도 취미로 진행하는 동아리나 극단도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 동아리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열정과 희생이 있어야만 가능한 취미 생활이죠. 특히 자신의 본업이나 직장을 별개로 다니면서 극단 생활을 함께 하는 분들을 보면 저 역시 감탄하고 맙니다. 연극은 종합예술이거든요. 내가 혼자 기획하고 혼자 완성하는 글쓰기와는 전혀 다른, 단체와 협동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결코 나 혼자 잘한다고, 혹은 내가 슬쩍 내뺀다고 해서 잘 끝낼 수 없어요.



올해 우연찮게 얻게 된 기회로 청년들과 함께 하는 연극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 있습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서 보는 무대, 한동안 연습할 기회조차 없던 연기를 뚝딱이고 연습에 일조하며 급하게 꾸려낸 무대. 돌이켜보면 캐릭터를 완벽히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시행착오도 많았고 돌발상황도 있었지만 결국엔 뿌듯함으로 막을 내린 활동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만들어 온 시나리오, 내가 만든 창작의 세계에서 떠올린 캐릭터의 이미지 그대로 연기할 수 있었다면 기존에 있었던 시나리오에 대사만으로 등장하는 캐릭터에 빙의해 연기하고자 하니 참 막막하더라고요. 이십 대 청년이 육십 살 먹은 사투리 쓰는 아줌마 연기를 한다니! 그놈의 사투리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대중매체 속 사투리를 연습해가며 만들어 낸 나만의 사투리 연기는 현지인들이 들으면 어이없어 할 거예요. 온갖 지역의 방언이 짬뽕된 사투리였거든요.



불행 중 다행으로 오랜만에 해본 연극을 통해 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는 내 모습이 좋지만, 정확히는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를 현실화하여 표현하는 과정이 즐겁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쓴 시나리오의 캐릭터가 무대를 뚫고 나오는 그 모습이 좋은 거였어요. 하지만 상상하지 못했던, 그저 종이 한 줄에 쓰인 소개가 전부인 캐릭터의 백스토리와 성격까지 파악해내며 배우로서의 역량을 드러내는 일 역시 즐거웠습니다.



아마 내 인생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 한 연극이나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는 일은 있을 수 없겠죠. 그만 한 재능이 내게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고요. 그래도, 만약에. 이러한 가정을 덧붙이며 자그마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질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모두 기대를 잃지 않고 살아가자고요. 꿈은 잃기 위해 품는 게 아니라, 이루기 위해 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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