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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Aug 25. 2023

브랜든, 브렌든, 코트니

    그러니까 브랜든은 그런 아이였다. 내가 동경하던,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클로이와 사귄 유일한 아이. 키는 클로이보다 작았지만 얼굴이 하얗다 못 해 창백하고 언제나 굽실굽실한 짙은 갈색 머리를 스냅백 속에 넣고 다녔다. 눈이 매서웠다. 그 눈으로 뭐든 꿰뚫어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브랜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까지도.

   학교에서는 날마다 가장 학년이 높은 5학년들이 순서를 돌며 점심시간에 교정을 순찰했다. 클로이와 둘이 순찰 당번이 된 날이었다.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어떻게 대화 주제가 그리로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내게 키스를 해 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이미 조숙한 클로이와 나를 비교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그런 경험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클로이는 그 전날 브랜든과 숲에서 데이트하며 키스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말을 들으며 클로이 입을 쳐다봤다.

   얼마 가지 않아 클로이와 브랜든은 헤어졌다. 결별 사유는 모르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 둘은 아직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왜냐면 점심시간이 끝날 즘 놀이터를 가로질러 무슨 노래를 듣고 있는지 서로를 향해 외쳤기 때문이다. 그때 클로이가 듣던 노래는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섹시 백(Sexy Back)’이었다. 로맨스가 완전히 결여됐다고 느껴서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러다 브랜든이 날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왜였을까. 내가 클로이 옆을 줄기차게 붙어다니려고 노력한 걸 꿰뚫었을까. 그는 종종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내 이름을 불러 인사했다. 브랜든의 교실 밖과 놀이터 사이에 이벤트성 아이스크림 가판대가 생긴 날이었다.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투명한 붉은색 지렁이 젤리를 같이 먹는다는 사실에 놀라며, 그리고 그 맛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것에 안도하며 주변을 잊고 입 속 달콤함에 매료됐다. 그때 브랜든이 내게 날씨가 좋다거나 안 좋다는 말을 하면서 슬슬 말을 걸었다. 그게 짓궂은 마음인지 순수한 관심인지는 분간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브랜든을 좋아하던 내 마음도 그런 헷갈림 뒤로 숨었고 브랜든이 내 이름을 부를 때 난 기뻐야 할지 불쾌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브렌든은 어떤 아이였나. 그는 Brandon의 a 대신 e를 써 이름이 Brendon이었다. 이름을 발음할 때 구강 크기가 더 작아져서일까. 브렌든은 큰 키에 비해 목소리가 가늘고 높았다. 항상 긴 소매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무척 수줍었다. 수줍은 웃음 위로 빼곡한 주근깨가 귀염성을 더했다. 브렌든은 MSN 메신저로 얘기할 때면 말 끝에 꼭 :D 이모티콘을 썼다. 정작 그 아이가 환하게 웃을 땐 눈을 꼭 감아 XD 같은 얼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브렌든이 날 좋아한다는 소문이 간간이 내 귀로 흘러 들어왔다. 다만 우리 학교에는 브랜든 두 명, 브렌든 한 명, 브래이든 한 명이 있었고 그들을 구별해내 매력점을 찾는 일은 내게 그닥 흥미로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 브렌든이 날 좋아하든 말든 내 일상을 영위했다. 브렌든이 보내는 옆으로 고개를 돌려 활짝 웃는 이모티콘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결국 내가 사랑한 건 브랜든도 브렌든도 아닌 코트니. 1년을 넘게 줄기차게 붙어다녔지만 누구도 우릴 쌍둥이 취급하진 않았던 나의 코트니. 그럼에도 난 그 아이를 쌍둥이처럼 생각했다. 처음 학교에서 다같이 수영장에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몸을 드러내는 일이 자신없음을 넘어 꺼림직했기에 질겁하며 담임 선생님에게 난 감기(cold)가 있어 불참하겠다 거짓말을 늘어놓으니 그 말이 잘못 전달돼 “희재, 물은 원래 차가워(cold).”라는 선생님의 답변을 듣고 의기소침한 상태로 수영장에 갔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새로운 수영복도 사고 수영장에 가는 일이 전처럼 두렵지만은 않게 된 날, 새 학교에서 수영장을 간 날 비키니를 입은 코트니와 나는 같은 위치에 살이 접힌 주름 자국이 있었다. 비록 우린 그 자국에 대해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난 그 순간 코트니와 깊이 연결됐다.

   옷을 얼룩말처럼 겹겹이 쌓아 입고, 더 심한 얼룩말인 의붓동생을 놀리고, 지각한 날엔 자신이 오지 않을까 겁났냐며 날 은근히 놀리던 코트니. 코트니는 내가 먹는 음식을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긴 적 없고 내 억양을 문제삼지 않았다. 내가 듣는 노래를 기꺼이 같이 들어주고 머라이어 캐리 신곡 뮤직비디오의 우스꽝스러움을 공유했다. 특별히 친절하지 않았기에 누구보다 천사 같았던 코트니. 나는 귀가 온전해서 끼지 못하는 귀걸이를 그에게 대신 사다주며 금색 머리 사이로 알록달록 땡땡이 후프 귀걸이가 달랑이는 걸 지켜봤다.

   코트니는 나를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지만 나는 코트니를 이름 약자를 따 케이디라고 불렀다. 그리고 코트니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면 그 아이가 특이한 성씨를 한 글자씩 사서에게 불러주는 순간을 특별히 좋아했다. 우리는 맹렬히 누군가를 조롱하고 반성은 하지 않고 많이 웃었다. 점심시간 교정을 거닐면서 그 시절 우리가 공유한 건 무엇이었을까. 공통 언어 너머로 주고 받은 웃음은 뭘 의미했을까. 코트니는 별뜻없이 웃는 일도 없고 웃지 말아야 할 때는 기가 막히게 아는 아이였다. 그래서 내게 코트니의 웃음은 오래 남는다. 코트니와의 시간은 그러면 안될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특별한 일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코트니를 사랑했다는 감각만 안고 그 아이를 오랫동안 그리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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