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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Oct 24. 2023

식인의 가르침, 리지아 클락

지난 주말에는 난생 처음으로 남자와 키스했다. 제라드는 나를 편안하게 만든다. 내가 가진 불안과 불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제라드의 고동색 눈을 보고 있으면 근심걱정이 뜨거운 시체스 태양 아래 있는 듯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속에서 뒤틀려있는 장기들을 그가 통째로 집어 삼켜 없애버린 것 같다. 제라드 앞에서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어제는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차를 마시고 밥을 먹었다. 친구는 내가 제라드와 만나는 걸 탐탁치 않아했고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을 우리는 열렬히 탐구했다. 결국 내린 결론은 질투였다. 나를 제라드에게 뺏겨버린 것만 같다는 친구의 말에 난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친구는 자신의 콩팥 하나를 제라드가 물어간 기분이었을까.


브라질의 예술가 리지아 클락Lygia Clark은 1947년에 작업을 시작해 회화, 조각, 퍼포먼스, 치료작업을 이어나갔다. 그가 주목하는 주제는 브라질 전통의 식인주의를 비롯해 내부와 외부의 합치, 그로테스크, 어머니와 아이의 몸 등이 있다. 2009년 연구된 미술사학과 김효정의 논문에 따르면 식인주의, 다른 말로 ‘카니발리즘은 서구인들의 담론 속에서 ‘경계 짓기’의 한 방편으로 이용된 개념 중 하나였다’고 한다. 즉, 서구인들은 식인주의의 의미를 넘겨짚고 자신들의 ‘정상적인’ 식습관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다. 역설적인 점은 식인주의의 핵심은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의 식인주의에서는 먹히는 자와 먹는자, 두 개의 몸이 하나의 통합을 이룬다. 안과 밖이 모호해지고 식인은 더 강하고 단단한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진다. 대립 개념은 식인주의 앞에서 무색해진다.


클락의 작업 <카니발리즘canibalismo>은 바닥에 누운 한 명의 참여자를 둘러싼 여러 명의 참여자가 눈을 가린 상태로 누운 이의 배에 달린 지퍼를 열어 그 안의 과일들을 꺼내 먹는 작업이다. 참여자들은 시야가 가려진 채로 더듬더듬 손을 뻣어 과일을 찾는다. 우글거리는 손 사이로 과육이 가득한 열매를 집어 입으로 넣는다. 달콤한 맛에 이내 참여자들 얼굴에는 미소가 번진다. 누군가는 손을 뻗어 바닥에 누운 참여자에게 사과를 건네 먹이기도 한다. 먹다 남은 과일을 다시 배 위의 주머니로 넣어 지퍼를 닫고 퍼포먼스는 끝이 난다. 얼핏 보면 그로테스크를 절로 자아내는 이 작업은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브라질 식인주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카니발리즘Canibalismo>, 리지아 클락, 2011

결국 식인을 야만적으로 보는 시선은 외부자의 것이고 식인주의자들은 식인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치유하고 이해하고 새로운 존재가 된다. 먹히는 사람도, 먹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먹히는 자의 몸은 가벼워지고 먹는 사람은 든든히 배를 채운다. 너의 것은 내 것이 된다. 타인을 통해 우리는 전에 없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직접 누군가의 살점을 뜯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레 식인주의를 습득하는 것 같다. 도나 해러웨이의 말처럼, 자신의 세계가 없이 오는 것은 없고 우리는 늘 타인의 세계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다. 영화 <본즈 앤 올(Bones and All)>은 식인을 하는 두 여남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다. 외부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주인공 마렌과 리는 끊임없이 받아들여질 구석을 찾는다. 끝내 둘은 식인을 통해 합치된다. 나도 누군가의 몸을, 영혼을 먹어치우는 경험을 한다. 제라드의 팔짱을 낄 때 그의 팔은 내 몸의 일부가 된 것만 같다. 친구의 질투를 흡수할 때 난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과 영혼을 들이켰음을 감각한다. 그렇게 난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새로운 몸으로. 새로운 내면으로. 어쩌면 우리는 모두 식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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