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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Oct 29. 2023

일탈로서의 일상, 로레나 볼페르

가정폭력은 거창하지 않다. 사소한 시선마저 사건이 쌓이면 폭력이 된다. 혼나는 일은 물론이며 부탁하는 일, 거절하는 일, 심지어 칭찬 받는 일까지도 폭력의 연장선에 놓인다. 그리고 가정폭력은 쉽게 등한시 된다. 가족 내의 일은 가족 안에서 해결하라는 지침이 더 큰 권력을 갖는다. 더군다나 가정 내 폭력이 폭력으로 가시화되기 힘든 사회 안에서는 생존자가 목소리를 내기 더 어렵다.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와 개인 안에서 너무나 큰 영향을 갖는 것이 가정폭력이다.


멕시코 예술가 로레나 볼페르Lorena Wolffer는 본인의 의지와는 달리 운동가라고 불린다. 혹은, 예술과 사회운동을 함께 하는 아티비스트(Artivist)로 보는 시선도 있다. 내게 볼페르의 작업은 외침이었고 선언문이었다. 2010년에 시작해 2016년에 완성된 작품 <증거들(Evidencias)>은 합동심에서 출발한다. 익명의 기부자들은 가정 내에서 자신이 경험한 폭력과 관련된 물건과 증언을 함께 제출한다. 제출된 물건에는 번호와 개입 없는 직접적인 증언이 붙고, 무게에 상관없이 천장에 매달린다. 잔인한 폭력과 위협을 암시하는 칼과 술병이 머리 위로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는 한편, 범죄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인형, 옷가지, 종이 몇 장도 천장에 데롱데롱 달려있다. 금방이라도 내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누군가의 증거들을 고개를 힘껏 젖혀 바라본다. 그리고 그 안의 사연을 마음 들여 추측해본다. 증거들이 주는 공포심은 물체가 내 얼굴에 떨어질 것 같다는 두려움과 중첩된다.


<증거들(Evidencias)>, 로레나 볼페르, 2010-2016


볼페르는 이 작업을 통해 성폭력이, 특히 가시화되지 않는 가정 내 폭력이 공개적으로 다뤄지고, 이해되고, 비난받아야 하는 사회문화적 문제임을 지적한다. 멕시코는 여러 페미니스트 단체와 시민들의 연합을 통해 여성을 위한 법 재정이 잘 되어있는 나라 중 하나다. 좋은 일이지만 어두운 면 역시 존재한다. 가정 내 폭력은 여전히 비가시화되고 사람들은 잘 짜여진 법 안에서 안전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정작 ‘증거들’을 완성한 익명의 기부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폭력에 대해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볼페르의 작업을 두고 이건 예술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반응도 적지 않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을 활용한 레디메이드의 조합일 뿐이라고. 쓰레기를 모아두었다고. 그렇지만 나는 일상 안의 잊고 있던 감각을 일깨우는 게 예술가의 일이며 예술의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연을 다 안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런 착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 매 맞는 아내의 사연은 단순한 가정 불화 사건이, 남편을 죽여야만 살 수 있던 여성은 희대의 살인마가 된다. 누군가의 일상은 일탈 같다. 매일이 새로운 상처의 연속이고 그에 익숙해질 틈은 없다. 다른 자세로 보아야 그 일상을 비로소 제대로 마주할 수 있다.


‘증거들’은 여성적인 예술의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때 여성적이라는 단어는 일상과 맞닿아 있다. 가정의 것. 여성의 일이라 여겨진 것. 큰 관심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것. 너무나도 쉽게 지워지는 것. 그런 것들을 다시 중앙으로 불러내는 게 여성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적인 예술은 결국 일상의 창조성을 보여준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람들이 간과할 수 없도록 만든다. 볼페르의 ‘증거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뒤로 젖혀야 하는 것처럼, 일상을 다시 제대로 보기 위해 불편한 자세를 기꺼이 감수하게 만든다.


난 나와 내 친구들, 내가 사랑하고 마음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집 안에서 편안하길 바란다. 탁자에 놓인 물컵, 전실의 골프채, 현관의 구두주걱, 주방의 칼을 보고 불안에 떨지 않기를. 우리 일상 안에서 특별한 일탈이 벌어지지 않아도 그 지루한 시간을 평안하게 영위할 수 있기를. 일상의 물건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일탈을 감행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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