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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Nov 05. 2023

차이를 감싸안는 일, 올라퍼 엘리아슨

살다보면 관계가 틀어지기도 한다. 너와 내가 잡은 손이 멀어질 때, 어떻게 이런 사람과 시간을 보냈는지 사뭇 놀라기도 하고 이 사람의 싫은 면모를 미처 못 본 자신을 탓하기도 하고 한때는 좋았던 우리 사이에 금이 갔다는 사실이 원통하기도 하다. 세월이 흐를 수록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같은 땅 위, 중력 안에서, 같은 하늘 아래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게 생경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차이를 애정과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이들만 있지는 않다. 왜 우리는 차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할까. 이해되지 않는 이를 끝까지 알아보려는 노력보다 나와 다른 사람임에 피곤해하고 비난하는 쪽이 쉽기 때문일까.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도마 위에 올리는 일 역시 그와의 차이를 감싸안는 일만큼 힘들고 피곤한 일 같은데 말이다. 분명 우린 같은 사람인데 왜 서로를 미워할까.


아이슬란드계 덴마크인 예술가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미술관 안으로 대자연을 가져온다. 내가 볼 때 엘리아슨은 친절한 예술가다. 얼핏 보면 추상적이고 와닿지 않는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면 그가 산뜻한 경험을 관객 가장 가까이로 가져다주는 소외없는 미술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아슨은 미술관에 태양을 형상화한 작품을 설치하기도 하고 빙하를 도심에 가져다 두기도 한다. 온갖 빛과 색이 관객을 덮으면 나도 몰랐던 감각이 일깨워진다. 엘리아슨의 작품이 있는 곳은 서늘하거나 시원하거나 따뜻하거나 덥다.


<노랑 대 보라Yellow versus Purple>, 올라퍼 엘리아슨, 2003


엘리아슨의 설치작업 <노랑 대 보라Yellow versus Purple>는 두 세계의 융화를 보여준다. 어두운 방 안에 천장에 매달린 노란색 원형 디스크가 있다. 방 한 쪽에서는 조명이 디스크를 향해 빛을 비춘다. 하얀 벽 한 면에는 노란색 원형이 반사된다. 한편, 매달린 디스크는 끊임없이 돌아간다. 디스크의 일부분은 빛을 반사시켜 노란색의 보색인 보라색 원을 벽에 비춘다. 보라색 원은 방 안을 빙빙 돈다. 관객이 방 안을 돌아다니면 관객의 몸 위로 빛이 스며든다. 관객과 오브제 사이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렇게 대상과 주체의 구분이 모호해질 때, 우리는 예술 안으로 들어간다. 엘리아슨은 색깔을 분석하는 일은 사실 우리 자신을 분석하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색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눈으로 볼 때만 존재하고, 그것도 각기 다른 색깔로 존재한다. 어떤 동물은 인간이 볼 수 없는 색깔을 보기도 한다. 색은 빛이 망막에 반사될 때만 구체화된다는 사실은 색을 분석하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을 분석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두 보색의 대립 가운데서 난 어느 쪽을 응원할 것인가. 가만한 노란색인가 동적인 보라색인가. 이런 생각을 하며 빙글거리는 보라색을 지나, 가만히 있는 노란색에 도달하고 두 원이 포개진 형상 아래 내 몸을 위치하기도 한다. 노란색, 보라색, 그리고 관객은 하나의 선 위에서 만난다.


벽에 반사된 원은 찰나의 순간 동안 겹쳤다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두 세계가 겹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 것. 차이 속에서 동질성을 발견하는 일. 관객은 자연과 인간, 색과 색, 서로 다른 대립항이 하나가 되는 그 순식을 놓치지 않고 경험한다. 그 일은 생각보다 부대끼지 않는다. 노란색에 보라색이 닿는 순간을 나도 모르게 기다리게 된다. 마침내 닿은 면은 순식간에 멀리 달아날 것을 알면서도.


보라색과 노란색이라는 대립항의 보색은 과학적으로 활발한 상호작용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의 눈에 자극을 준다. 자연스레 참취와 미역취는 함께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조합을 만들어낸다. <향모를 땋으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생태학자 로빈 윌 키머러가 서구 과학과 토박이 지식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에세이다. 작가는 참취와 미역취가 갖는 조화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명한다. 자주색 참취와 노란색 미역취의 아름다운 조화에 대해 물질적이면서도 영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세상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과학의 눈과 전통 지식을 모두 활용해야 한다는 작가의 지적처럼, 서로 전혀 달라보이는 두 속성은 함께일 때 빛을 발한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보색에 끌린다. 우리의 다른 부분이 퍼즐조각처럼 맞춰질 때 더 큰 희열을 느낀다. 결국 세상은 보색이 있기에, 대립항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엔트로피 덕분에 좀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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