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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Sep 03. 2024

호주, '삶의 마지막 날'은 누구와 어디서?

준비된 자와의 이별은 슬프지만 마음 아프지 않다.

J의 집 앞마당 뒷마당엔 재미난 것들이 많았다. 잘 가꾼 넓은 정원 사이로 이름 모를 새들이 푸득이는 커다란 새장이 있었고 양계장에선 몇 마리의 닭들이 날마다 알을 낳았다. 수풀 속 연못엔 셀 수 없이 많은 오렌지색 금붕어들이 헤엄을 쳤다. '몇 년 전 금붕어 두 마리를 사다 넣었는데 이렇게 불어났지 뭐야.' 무심하게 말했지만 날아다니는 야생 새까지 때가 되면 이곳에 날아드는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었다. J는 주변을 잘 거두고 챙기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빛바랜 엄마의 사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J와 함께 성경을 읽었던 마지막 만남.

J는 100살을 몇 달 앞둔 장수 할머니였다. 가까이 사는 자식들이 식료품 구입이며 병원 방문을 돕기는 했지만 몇 달 전까지도 홀로 독립적인 삶을 꾸렸던 분이었다. '엄마가 곡기를 끊으셨다. 때가 온 것 같다.' 환갑을 넘긴 그의 막내딸의 연락을 받으며 착잡해졌다. 살만큼 사신 분이고 스스로도 '난 이미 갈 준비가 됐다'고 말해 오셨지만 지난 10여 년 가까이서 우정을 나눈 분과 마지막 인사를 하려니 마음이 스산해졌다.

J가 나고 자란, 죽을때까지 살던 포트씨의 바닷가 풍경

약속한 시간에 맞춰 아들과 남편과 J의 집에 도착했다. 함께 있던 J의 가족들은 조용히 이야기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줬다. 늘 앉아 계시던 거실 소파에 힘없이 몸을 기대고 꺼져가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고 계셨지만 정신은 멀쩡하셨다. 원래부터 기억력이 탁월하셨는데 마지막까지 총명하시니 축복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짧은 시간, 무엇을 하면 좋을까?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준비해 온 성경을 펴고 시편 23장을 같이 읽자고 했다. 의욕을 내며 안경까지 찾아 끼셨지만 이내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고 슬퍼하신다. 옆에 앉아있던 사춘기 아들이 불쑥 나서 '제가 읽어드릴게요' 하더니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요즘 한참 툴툴대던 아들인데 왜 이리 상냥한 건지.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와 함께 계실 것이요..' J도 기억이 나는지 어떤 구절은 입술을 달싹이며 암송을 하셨다. 위로와 평안을 구하는 기도까지 마치고 나니 진정 평화의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J는 지난 세월 자신을 찾아주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고 인사했다. 우리 가족도 돌아가며 감사의 말들을 전했다. 10년 전 교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 따뜻하게 환영해 주었던 것을 감사해했고 아들은 뒷마당 연못에서 뜰채로 금붕어를 잡아 와 우리 집에 수족관을 만들었던 어느 오후의 추억을 나누었다. J는 '인생을 즐기면서 살라'는 쿨한 유언을 아들에게 남기셨다. 서로 손을 잡고 따뜻한 포옹과 볼키스까지 10-15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J는 이미 피곤하여 다시 잠으로 빠져 들었다.


거실을 나오니 막내딸이 눈물을 훔치며 엄마를 보러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빨갛게 부운 눈이었지만 차분했던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고 말했다. 멀리서 온 가족들은 물론 동네 이웃들, 해외에 사는 친인척들과도 화상채팅으로 작별을 나눴단다. 이혼하고 집 나간 전 며느리까지 찾아왔으니 떠나기 전 아쉽게도 못 만난 사람은 없는 듯하다. 손녀딸이 데려 온 증손녀 세 자매가 까르르 대며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며칠 뒤 J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며 했던 생각들은 이랬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집에서 가족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는 것은 힘들고 슬프지만 이상적이라는 것.

호주에서 출산을 경험한 이들이 종종 의료진의 개입이 최소화된 '자연출산'에 대해 충격을 받거나 감탄을 하거나 하는데 죽음이란 부분에 있어서도 그런 듯하다. '자연사-당연히 일어날 일들이니 순리에 맡기자'를 지향한다고 할까. 내가 전문 의료인이 아니라 모를 수도 있고 당사자의 처한 환경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호주에서는 많은 이들이 병원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죽고 싶어 하고 실제로도 그 바램을 이루어주려고 주변인들이 노력을 많이 한다.

딸이 간호사여서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Palliative Care-죽음을 앞두고 고통 경감등 최소한의 의료만 개입하는 서비스를 받았을 것이다.) J도 본인 뜻대로 자신의 침대 위에서 자신의 옷을 입고 자신만의 일상을 마지막까지 유지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어린 소녀들은 이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세월이 흐르면 여러 사실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고조할머니의 빛바랜 흑백사진을 앞에 놓고 엄마를 만나러 가겠다며 죽음을 기다리던 증조할머니, 그런 엄마를 살뜰히 돌보며 조용히 눈물짓던 할머니, 그런 엄마가 안쓰러워 거실과 마당을 들락이며 가족들을 거들던 엄마, 그리고 동생들과 물구나무서며 태평스럽게 놀던 어느 여름 방학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쯤을 단편적으로 떠올리지 않을까. 

다섯 세대에 걸친 여인들의 잔잔한 서사와 차분히 서로를 챙기던 가족들의 사랑, 짧지만 따뜻했던 J와의 마지막 시간들은 내게도 나른한 추억으로 남았다.



오늘도 거실 한쪽에 놓인 금붕어 수족관 앞에서 커피를 마신다.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도 펄떡이며 먹이를 낚아채는 모습도 다 보기 좋다. 가끔씩 다정하고 친절했던 J를 생각한다. 매일 먹이를 주고 유리를 청소하고 필터를 갈아 끼우는 내 아들도 그럴 것이다.




https://v.daum.net/v/20240903041528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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