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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Aug 27. 2024

호주, '죽은 자와의 대화'가 즐거운 이유.

산책길에 만나는 친구들이란..

오늘도 산책에 나섰다. 이 바닷가 마을에서 10년을 살고 있지만 미처 걸어보지 못한 작은 길들을 새롭게 발견하고는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처음 걸어보는 피얼슨 바닷가.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감탄하며 걷다가 나는 또 생뚱맞게 죽은 자들을 만난다.

페이 그리핀스. 3년 전 77세로 죽은 그녀는 이 바닷가 풍경을 여러 해 동안 사랑했단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으며 평안히 쉬시라고, 페이를 사랑했던 가족들은 그리움을 담아 작은 현판을 만들어 붙였다. 산책길 모퉁이, 수풀에 둘러 쌓인 쉼터의 작은 벤치에 앉아 몇 줄 안 되는 문장을 읽으며, 그 여인이 즐겼다는 풍경을 나도 바라본다. 파도 소리를 듣는다. 내 마음도 평안해진다. 수년 전 이 산책길을 꽤나 오르내렸을 페이를 만나고 그 가족의 사랑 담긴 마음도 헤아려 보며 걸음을 옮긴다.

작은 오솔길을 몇 발짝 걸을 때마다 풍광이 바뀐다. 기암이 보이고 깎아지른 절벽이 나온다. 그 사이 마주한 또 다른 벤치에서 이번엔 앨런과 도로시를 만났다. '당신의 자식들과 손주들, 증손자들은 영원히 당신들을 기억할 거예요.' 다정한 메시지를 읽자니 노부부가 오붓하게 손잡고 이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졌다.

호주 동네 곳곳의 공원이나 벤치 등지에는 이런 류의 작은 현판이 수도 없이 붙어있다. 저 세상으로 떠난 누군가를 기억하고 싶은 이 세상의 누군가가 그가 가장 사랑하고 자주 다니던 어느 곳에 작은 현판 하나 붙여 놓고 그리울 때마다 찾아가 그를 만나는 것이다. 

요란하게 묘지를 만들 이유도 없다. 카운실(구청)에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장소를 지정하면 그만이다. 유가족들도 산책 오듯 가뿐하게 와서 죽은 자가 즐겼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그가 호흡했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그와의 좋았던 시간을 추억하리라..

나도 이미 십 대의 아들에게 내 생각을 전해놓았다. '낯선 공동묘지에 낯 모르는 여러 사람과 함께 누워 있거나 작은 납골당에 갇혀 있기 싫다. 유해는 화장해서 자연에 뿌리고 내가 즐겨 다니던 동네 바닷가 산책길 어디 매에 작은 표식 하나 남겨다오.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씩 앉아 쉬어가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가끔 네가 손자와 손잡고 놀러 와 내 앞에서 좋은 시간 보내다 가면 더 바랄 게 없겠다'라고. 내 마음을 얼만큼 헤아리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해주는 어린 아들이 고마웠다.

내 앞에서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 말기를, 먹지 않을 음식 준비하고 싸오느라 분주하지 않기를, 가끔 예쁜 꽃 몇송이는 그래도 놓아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는 좀 더 세월이 흐른 뒤 해도 될 듯 하다.

깊고 푸른 바닷물 뒤로 매일 해는 뜨고 진다. 때때로 바람 불고 파도는 출렁인다. 간간이 사람들이 찾아와 길을 걷고 낚시를 하고 다이빙을 하고 사진을 찍는다. 그거면 족하다. 이곳에 손바닥만 한 현판을 남긴 사람들도 다 그런 마음이지 않을까.



야무지게 배낭을 메고 트래킹을 하던 백발의 여인이 다이빙하는 두 청년을 걱정한다. 파도가 높아 위험하고 사고가 많이 나는 지역이라 늘 안전을 당부하는 곳인데도 겁 없이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 바닷가 근처에 오래 살아 이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을 꿰고 있었다. 퇴근길에 서핑을 하다가, 가족들과 여행을 왔다가, 여유롭게 낚시를 하다가 황당하고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해마다 꼭 있다. 나도 이 동네에 산다고 하니 여행객인 줄 알았는데 반갑다 해서 서로 통성명을 했다. 이 바닷가 뒤엔 어떤 길이 있는지 정보도 얻고 가족이며 일상까지 사는 얘기를 나누다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까지 하며 헤어졌다. 

그렇게 산 자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모퉁이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났다. 20년이 다 된 낡은 현판은 녹이 슬고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그의 메시지는 단순하고 유쾌하다. 'Enjoy The View'  그의 제안에 동감하며 다시 한번 뒤돌아 멋진 뷰를 즐긴다.

집으로 돌아오며 바라본 하늘에 무지개가 걸렸다. 하늘과 땅을 잇는 무지개처럼 죽은 자와 산 자의 경계가 어우러졌던 오늘의 산책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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