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파기를 통해 바라본 다양한 세상인들.
좀 지저분하지만, 호주인과 ‘귀지’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1998년), 막 일본 여행을 다녀온 호주인을 만나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정말 신기한 물건을 하나 사 왔다며 보여줬는데 다름 아닌 ‘귀이개’였다. 이 작은 숟가락으로 귀를 판다는 사실을 너무 신기해하길래 그럼 당신은 무엇으로 귀를 파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평생 귀를 파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때는 그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려하면서 지나갔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도 귀지를 파내지 않고 살고 있다. 일부러 작정을 한 것은 아니었고 처음에는 떠돌이 여행자로 살며 소소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주 이유였다. 어느 날 수년이 지났음에도 내 귀가 매우 청결하고 별 이상이 없음에 불현듯 놀란 뒤, 굳이 귀를 파지 않아도 된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물론 당시 영어가 잘 안 들려 고생을 하긴 했지만 그건 귀지가 귀를 막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지난 여름, 수영장에서 놀다 귀에 물이 들어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빠지지 않고 먹통이 되어 병원에 갔다. 담당의사는 귀가 완전히 막혔다며 ‘왁솔’이란 약(들러붙은 귀지가 말라 뭉쳐 귀 속에서 잘 떨어지도록 돕는 약)을 귀에 한 방울씩 일정기간 넣은 뒤 다시 오라 했다. 며칠 뒤 갔더니, 의사는 왼쪽 귓구멍에 작은 압착기를 대고 엄청난 압력으로 귀지를 빨아냈다. 실로 민망한 크기의 것이 빠져나왔고 난 다시 예전처럼 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귀지를 파지 않은 약 12년의 세월 중 귀에 문제가 생긴 단 한 번의 경우였다. 비록 큰 귀지를 빼냈지만 이것이 오랫동안 귀를 파지 않아서 생겼다고는 보지 않는다. 수영장 물이 들어간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고, 며칠간 투입한 약물이 말라붙어 커진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귀지를 양쪽 다 파지 않았는데, 한쪽에서만 귀지가 쏟아져 나왔기도 했고.
얼마 전 4살짜리 아들 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밖에서도 보일 만큼 귀지가 제법 똘똘 뭉쳐있는 것이었다. 놀라서 손톱깎기 세트 안에 들어있는, 한 번도 쓰지 않아 아직도 윤이 반짝이는 귀이개를 들고 아들 귀를 얼른 파주었다. 생각해보니 태어나서 한 번도 귀를 파준 적이 없다. 어릴 때 정기적으로 엄마 무릎에 기대 귀 소제를 받던 걸 기억하면서 나의 게으름을 자책하고 반대쪽 귀를 파주려고 봤는데, 놀랍게도 아주 깨끗했다. 그래서 짧은 반성을 서둘러 끝내고 과연 귀지를 매번 파는 게 좋은지 아닌지를 고민하게 됐다.
마침 40대 동네 아줌마들과 대화를 하다 궁금한 걸 물어보았다.
옆집 아줌마: 평생 귀지를 판 적이 없고 귀에 아무 이상도 없다. 샤워할 때 매번 귀를 닦으면 그만이다. 내 아이들 셋도 귀를 파준 적이 없다. 도대체 왜 파는가?
뒷집 아줌마: 평생 귀지를 파지 않았다. 십 대 때 귀에 문제가 생겨 병원에서 엄청난 양의 귀지를 뽑아낸 적이 한번 있다. 그때 귀지라는 걸 육안으로 처음 봤다. 덩어리가 커서 좀 놀랐지만 그 뒤로도 귀지를 파지는 않는다. 네가 말하는 귀이개가 뭔지는 알지만 써 본 적 없다. 아이들 귀도 파지 않는다.
요즘은 한 번씩 아들 귀도 유심히 보고 내 귀도 한 번씩 살피는데 귀지가 별로 없다. 아마도 샤워할 때 매번 귀를 씻기 때문일 것이다. 내 추측엔, 아시안 몇 개국을 제외하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귀를 파지 않을 것도 같다. 어느 이비인후과 의사나 제약회사에서 귀를 파거나 파지 않는 세계 인구분포도 조사를 했을 것도 같은데, 정확한 결과는 나도 모르겠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귀지를 안 파도 괜찮으니 파지 말자는 게 아니다. 파고 싶은 사람은 파고 안 파고 싶은 사람은 안 파도 된다는 ‘선택’에 대해서 말하는 거다. 귀를 안 파는 사람을 더럽다고 보거나 그런 민족을 미개하다고 판단하지 말고 다양한 선택과 방식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으니까. (2010/10/17 씀)
참고로, 난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귀를 파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아들 귀는 파준다. 아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따뜻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될 것 같아 그렇기도 하다. 엄마 무릎에 기대 누워 조금씩 파낸 귀지를 손바닥에 모아가며 이런저런 농담을 하는 순간들이 정겹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