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과 찜질방의 공통점은?
호주에는 수영장이 많다. 모든 동네마다 크고 작은 수영장이 반드시 있고 웬만한 개인집에도 수영장이 흔하게 있다. 실내외 수영장과 사우나 냉탕 온탕이 고루 갖추어진 아쿠아 센터도 드물지 않다. (호주엔 대중목욕탕이 따로 없는데 수영장에 가면 이런 설비들이 있어 한국 사람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종종 애용한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부자들만 이런 동네에 살거나 수영장 딸린 집에 사는 게 아니다. 한국의 대중 목욕탕만큼이나 수영장이 흔하다는 거다.
내가 사는 시골 스킵튼에도 조그만 야외 수영장이 있다. 12월부터 3월 중순까지 여름 시즌에만 물을 채워 개장하는데, 회원권을 끊어 무시로 애용하는 편이다. 이유를 들자면,
1. 환경보호를 이유로 에어컨을 쓰지 않고, 선풍기 바람은 좋아하지 않아 날이 더우면 피할 방도가 달리 없기 때문이다.
2. 집에서 가깝기 때문이다.
3. 아들은 아들대로 나는 나대로 이웃과 친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4.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3달간 이용하는 비용이 10만 원 안쪽)
5. 수영장 설비와 다양한 오락 교육 프로그램이 나름 훌륭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들을 데리고 무시로 수영장을 드나들다가 지난주는 일주일 내내 수영장에서 살았다. 아들이 수영 레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느꼈던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눠볼까 한다.
1. 수영은 필수, 수영 복지 확실하다.
호주인들은 수영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다. 주변에 바다나 수영장이 많아 물에서 놀 기회가 흔하기 때문에
이른 나이에 수영 기술을 익혀 평생토록 즐기고 각자 안전을 추구하라는 뜻일 게다. 스킵튼 마을 수영장은 방학이면 주정부가 후원하여 저렴하고 알찬 어린이 수영 강습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40분*5회 수업이 3만 원 미만, 호주 시장 가격의 20% 정도) 인터넷으로 강습을 신청하면 주정부에서 인증받은 강사가 이 먼 곳까지 찾아오니 너무 편하다. 수영을 정규 교과쯤으로 여기고 나라가 나서서 가르치니 사교육으로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학년별로 수영 레슨이 또 있다. (그럼에도 사설 강습을 따로 받는 이들도 있지만.)
2. 육아를 즐기는 자세.
4-5살 유치원 친구 6명이 레벨 2 반에 함께 등록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과 엄마들을 모두 아는데, 이 엄마들한테 좀 놀랐다. 레슨이 10시 반에 시작하니 아직 썰렁한 아침인데, 자기 아이를 둘셋씩 이끌고 씩씩하게 와서는 오후 서너 시가 될 때까지 수영장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난 레슨 마치면 잠깐 놀다가 집에 가려고 도시락도 싸가지 않았었다. 근데 첫날부터, 아들도 집에 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서너 시까지 물속에서 놀았다.
(마침 소시지를 구워 팔길래 그것으로 점심을 때우며)
호주 엄마들은 간식이며 도시락까지 바라바리 싸와 놀고먹으며 하루를 수영장에서 내내 보내고 일주일을 내내 수영장에서 놀았다. 헉! (물론 나도 다음날부터 도시락 싸들고 수영장에 갔다.^^)
아기랑 물속에서 놀다가 선탠을 하다가 낮잠을 자다가 먹다가 때 되면 아기를 재우다가 하면서 여유 있는 휴가를 즐기는 거였다. 이런 걸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하나. 아이 레슨 핑계 대고 자기 휴가를 온 것 같았다.
여유가 있다고도 할 수 있겠고, 이렇게 적극적으로 즐기니 육아가 따분할 틈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오지 않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아까워하며 원 없이 함께 노는 현명한 엄마들이다.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잘 놀고 엄마들은 또 모여 수다 떨며 놀고 아빠들은 일을 마치면 수영장으로 퇴근하여 가족을 챙기며 또 한바탕 논다. 한두 살 아기부터 80 먹은 노인네까지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모여 수영장이 한 계절 내내 동네 사랑방이 되는 것도 신기했다.
3. 보편화된 탄력 근무, 잡 셰어링
사실, 이들 엄마들 대부분은 파트타임으로 일을 한다. 아기가 둘셋이 돼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일을 하면서 사회활동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파트타임제나 쟙 셰어링이 어느 직종에서나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 제도가 필요하다. 조직에 묶여 삶의 즐거움을 찾지 못하는 노동자를 도울 수도 있고 직장맘의 육아 부담을 줄여 출산율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도 있다. 수입이 일부 줄어도 삶의 질은 격이 달라질 것이라 장담한다. 너무 돈돈 하지만 않는다면.
4. 수영장 vs. 찜질방
에피소드-1)
물에서 한참을 놀다 나온 엄마가 잔디 위에 수건을 깔고 벌러덩 눕는다. 선탠을 하며 낮잠을 자겠다는 거다. 따갑다 못해 뜨거운 오후의 햇볕을 쬐며 낮은 못소리로 신음처럼 뱉는다.
"내가 정말 이 맛에 산다. 끄응.." (This is the life...)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한국에서 공중목욕탕을 가면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그며 아줌마들이 끄응 내는 소리와 일치한다. 호주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몸을 누이며 한국 사람들이 찜질방에서 느끼는 감정들을 갖는 듯하다. 사실 바닷가 뜨거운 모래밭에 누워 햇볕을 쬐는 기분은 정말 삼삼하다. 찜질방 이상으로 뜨끈하면서 동시에 상쾌하고 시원하다. 피부가 작살나는 게 문제일 뿐. (호주는 기본적으로 선탠을 권장하지 않는다. 자외선이 너무 강해 의학적으로 위험하다. 그러니 그 위험을 무릅쓸 만큼 햇볕 아래 눕는 것이 황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이 엄마들은 수영장에서 잘 놀고, 잘 쉬기도 하는 것이다.
에피소드-2)
‘혼자 왔어요? 우리 한판씩 등 밀을까?’ 혼자 목욕탕을 가면 이런 사람들이 꼭 있었다. 그런데 호주 수영장에서도 만났다. 어느 날 옆집 엄마가 넓은 등짝을 내게 들이대며 ‘안 바쁘면 여기 선크림 좀 발라줄래?’ 할 때 화들짝 놀랐다. 한국이든 호주든 모든 인간은 타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등짝이 있다는 사실. 등은 아무리 잘나도 제 혼자 세상 살기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공동체로서의 삶을 추구하게 만드는 신체 부위이다.
호주 시골 수영장이나 한국 동네 목욕탕이나 마을 사람들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며 즐기다가 이웃의 소중함도 깨닫는 그런 공통점들이 있는 것 같다.
5. 레슨에 적극 참여한다.
물론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이기도 하겠지만, 엄마들은 레슨 중간에 아이들에게 다가가 지도에 동참한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난 아직도 수업=교권 이란 개념이 있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데, 호주 엄마들은 필요할 때마다
"딴짓하지 말고 선생님 말 들어!"
"그게 아니고 이렇게 하라는 거야." 말하며 주저 없이 나선다.
그런데 코치도 엄마들의 그런 참견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애들은 나한테 맡기고 저리 가시오' 하는 게 아니라 '그래, 우리 같이 해봅시다.' 하는 식이다.
열린 수업, 열린 관계라고나 할까.
"난 엄마 노릇은 해도 선생님은 못할 것 같아. 이 골치 아픈 애들을 어떻게 해.." 엄마들은 혀를 차며 서로 찡긋 댄다. '그러니 나라도 좀 도와야 하지 않겠니..'라는 개념인 듯. 그러면서도 강사를 존중하며 선을 넘지 않는다. 다르다. 재밌다.
6. 비키니는 수영장의 정장이다.
엄마들은 꽤 자주 비키니를 입는다. 몸매와 상관없이. 이들은 비키니를 입고 수영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코치와 상담도 하고 옆집 아저씨와 수다도 떤다. 완전한 복장이니 더 이상 입을 게 없는 거다. 또 옷이기 때문에 매일 같은 걸 입으면 그렇다. 날마다 다른 걸 입는다. 그러면서도 끔찍해한다.
'일본에 갔는데, 사람들이 나체로 모여 목욕을 하더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긴 비키니가 훨씬 보수적이긴 하다.
7. 너무도 구체적인 수료증
5일간의 레슨을 마치고 마지막 날 수료증을 받았는데 그 뒤를 보니 무려 20가지가 넘는 항목이 나열되어 있었다. 물속에서 걷기, 보조 기구 안고 10 미터 앞으로 가기, 바닥에 발 안 대고 3미터 움직이기 등등.. 그 항목 중 아들이 완수한 부분들이 열댓 개 체크되어 있었다.
대충 노는 것 같았는데, 철저히 매뉴얼대로 가르치고 꼼꼼히 결과를 점검한 제대로 된 수료증이었다. 만족스러웠다. 아들도 나도 많은 것을 물속에서 물 밖에서 배웠던 그러나 휴가처럼 즐겁고 여유로웠던 일주일이었다. (2012/01/29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