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노는 방식의 차이는?
파티나 잔치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모여 다 같이 먹고 마시며 논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사회마다 그 먹고 노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요즘은 한국에서도 서양식 파티가 흔한 듯한데, 단순히 어깨 드러낸 드레스 입고 와인잔 들고 서성이며 낯선 사람들과 대화한다는 겉모습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호주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이유의 파티를 다녀보면서 내 나름대로 느낀 커다란 차이점 몇 가지를 정리해 보겠다.
1. ‘음식’ 혹은 ‘사교’, 치중하는 것이 다르다.
회갑 결혼 돌이든 혹은 간단한 집들이나 주변 친구 몇 명을 초대하는 소모임이든, ‘무엇을 먹느냐’는 잔치에서 가장 우선해야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큰 잔치일수록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밥부터 먹고 배를 채워야 서로 인사도 하고 놀기도 하는 것이다. 무언가로 배를 불리지 못하면 ‘나를 여기 왜 불렀나! 무시하는 건 아닌가!’ 하며 불안 불쾌해하는 경우가 많다.
파티에서도 음식이 중요하지만 최우선은 당연히 아니다. 내 생각엔 ‘사교’가 먼저다. 가령 10명이 모여 저녁을 먹는다 하면 이들은 누구를 부르고 어떻게 자리를 배치할 것인지 부터 고민한다. 누구 옆에 누가 앉는 것이 즐겁고 부담이 없겠는가 하는. 부부가 주로 모인 자리에 싱글 남녀를 불러놓고 옆에 붙여놓으면 왠지 불편할 수가 있다. 그때 이들을 적당히 떨어 앉혀 놓으면서도 기회가 되면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주선하는 등의 역할을 주최 측(호스트 혹은 호스티스)이 한다.
사람들과 모여 놀고 싶은데 음식 준비가 부담이 되는 경우 식사 시간을 피해서 만난다. 주로 ‘모닝 티’ ‘애프터눈 티’ 혹은 ‘써퍼’ 등으로 이름을 붙이는데 간단히 음료와 다과 1-2 접시만 놓고 대화 위주로 모이는 것이다. 식사 시간을 피하기 어려우면 음식을 한 가지씩 해오라고 해서 뷔페식으로 먹든지 한다.
결혼을 예로 들어 보자. 오픈 인비테이션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특별히 초대장이 없어도 누구든 갈 수 있다. 식이 끝나면 사진 촬영하고 그냥 끝인 경우도 있고 간혹 차 한잔에 케잌 정도 먹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식만 보고 맹숭맹숭 집에 간다. 웨딩 리셉션(피로연)은 그날 저녁 어딘가의 연회장에서 열리는데 자리가 배정되므로 초대장이 필요하다. 가족 등 가까운 친지만 불러 결혼식보다는 규모가 작은 인원인 경우가 많다. 리셉션 장에 가면 바로 식탁에 앉는 게 아니고 로비에 서서 음료에 핑거푸드 정도로 허기를 달래며 한참을 서서 얘기한다. 간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인사도 나누고 웬만큼 할 얘기 다하고 나면 그제야 본 연회장 안에 들어간다. 처음엔 음식 준비가 덜되서 손님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 줄 알았다.
몇 코스 사이사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있어서 디저트는 느지막한 밤중에 먹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거 다 먹어도 나오면 허전한 경우가 있다. 얼마 안 되는 음식을 천천히 먹으며 내내 수다를 떨어서 그런가. 어쨌든 호주 파티에서 배 터지게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2. ‘노동’과 ‘여가’는 철저히 분리된다.
음식이 모임의 주가 되서인지 잔치는 할 일이 많다. 음식 준비하고 차리고 치우고 하는. 그래서 주인이나 손님이나 같이 일을 한다. 누구 집에서 부부동반 모임을 하면 부인들은 도착하기 바쁘게 부엌에 들어간다. 같이 일하면서 웃고 떠들고 그것이 놀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잔뜩 불러놓고 장만 봐놓은 뒤 같이 무엇을 만들어 먹자는 경우도 있다. 먹다가 모자라면 또 장 봐서 또 해 먹고 같이 치우고.
파티하는 동안 손님은 그야말로 놀고먹고 끝이다. 일하지 않는다. 일은 초대한 사람이 하거나 혹은 이미 부탁해 놓은 누군가가 옆에서 도와준다. 잔치는 열명이 모이면 열명이 부엌을 들락이고 파티는 특별히 바쁜 경우 아니면 미리 정해논 2-3명만 들락일 뿐이다. 같은 친구라도 ‘오늘은 내가 일하는 사람이니 나는 서빙을 하겠다’고 선을 긋고 뒤로 빠진다. 또 사교(대화, 놀이, 여가)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치우는 일은 손님들이 다 간 뒤 하는 경우도 많다. 사교에 집중하기 위해 손님들이 이것저것을 준비해오기도 한다. 와인을 냉장해서 들고 오기도 하고 공원에서 바베큐 파티를 할 때는 자기가 먹을 접시와 포크 컵 의자 샐러드 등을 각자 챙겨 오는 게 일반적이다. 주최 측의 할 일이 그만큼 줄어든다.
한국인 20명이 바베큐를 하면 20명이 불판에 빙 둘러 서 있는다. 호주인은 2명 정도가 서서 고기를 굽고 나머지는 의자에 앉아 편하게 노닥이다가 요리가 끝나면 집어다 먹는다. 그래서 한국 가정의 잔치에 갈 때는 일하기 편안 옷을 입고 호주 가정의 파티에 갈 때는 좀 빼입고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다. 한국 여인들은 허드렛 일만 하면서도 열심히 화장하고 명품백 들고 온다. 호주 여인들은 대충 입고 와서도 파티장 (그곳이 거실이든 정원이든) 에만 머문다.
한 번은 호주 부부가 한국 여인들 몇몇을 저녁 초대했다. 식탁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이젠 본격적으로 대화를 하려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여인들이 하나씩 하나씩 부엌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설거지를 하겠다고. 호주 부부는 ‘그건 우리 일이니 신경 쓰지 말고, 간만에 모였는데 여기서 얘기나 좀 하자’고 간곡히 부탁을 하는데, 여인들은 앉아서 밥까지 잘 얻어먹고 설거지를 안 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며 우르르 몰려가 일을 시작했다. 호주 부부는 매우 당황해하며 썰렁한 거실에서 우둑이 앉아 있었다.^^ 왜 모처럼의 여가에 일을 하려 드는지, 손님이 주인의 의도를 따르지 않는지 이해를 못 하는 거다. 먹으면서 쉬었으니 이제 일을 하겠다는 잔치 손님과 간만에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 귀한 사교 시간을 설거지나 하느라 놓쳤다고 허망해하는 파티 주관자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3. ‘예정, 계획’인가 ‘돌발, 즉흥’인가
주최자는 파티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누구를 불러 무엇을 먹고 어떻게 놀지는 주인 맘이다. 때로 주인은 저녁 메뉴 구성을 위해 샐러드를 가져오라, 디저트를 가져오라 주문하기도 하고 어떤 옷을 입고 오라 (드레스 코드) 일러주기도 한다. 정장 캐주얼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주로 주제에 맞게 특정 색깔의 옷, 70년대 패션, 하와이 스타일의 옷을 입으라든지 하는 식이다. 그럼 손님들은 입으라는 옷을 입고 가져오라는 음식을 들고 가서 논다. 음식을 내오는 순서나 게임을 하는 등의 진행도 주최자의 안내를 따른다. 그런 것들이 나랑 잘 안 맞아도 그날만큼은 하자는 대로 하는 게 보통이다. 10명을 초대하면 10명이 온다. 못 올 경우엔 미리 연락한다. 모든 것이 계획적이고 예정대로 진행된다.
잔치는 주와 객이 따로 없다. 일도 같이 하지만, 손님들이 알아서 뭔가를 해줄 때 주인은 오히려 편하기도 하다. 또 중간중간 누군가가 나서는 돌발성 즉흥성은 때론 무드를 고조시키기도 하지만 주최 측을 당황시키기도 한다. 가령 집들이 잔치에 가면 손님 중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짓궂은 게임을 진행하거나 한다. 점심 먹으러 왔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고 저녁 먹으러 왔다가 자고 간다. 10명을 초대했는데 20명이 오기도 하고, 오리무중 등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흔한 핸드폰은 어디 뒀을까. 하긴 누가 주최자인지가 불분명해서 어디다 연락을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을 것이다.
4. 안주인과 호스티스의 역할이 다르다.
같은 의미의 단어지만 역할은 현저히 다르다. 모임을 주관하는 자가 남자(호스트) 일 때, 그 부인의 역할(호스티스)은 막대하다.
잔치를 주관하는 안주인은 부엌 일로 시작해서 부엌 일로 끝난다. 명절 때의 며느리들을 생각하면 되겠다. 손님이 찾아와도 얼굴 내밀을 시간이 없다. 거실에 마주 앉을 기회는 더더욱 없다. 차마시며 대화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그저 종종 대며 일하고 서둘러 음식 한 상 차려 내는 것이 그들의 인사고 역할이고 임무다.
파티의 호스티스는 반대로 부엌일을 할 시간이 없다. 웬만한 부엌일들은 손님이 오기 전 준비하거나 후로 미뤄놓고 (물론 전후로 상당히 바쁘고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파티 동안은 가까운 누군가에게 주방을 맡겨놓은 채 거실에서 활발히 ‘활동’한다. 여기서 활동이란 오는 손님을 문 앞에서 반가이 맞고 안으로 안내해 마실 음료를 권하고 대화할 만한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연결시켜 주는 일이다. 그래서 손님이 소외되지 않게 내 집에서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하는 것이 주임무(많이 먹이는 것만이 아닌)다. 그래서 안주인이 허드렛 옷을 입고 기름 냄새 풍기며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반면 호스티스는 깔끔히 옷 입고 상쾌하게 손님을 맞는다.
한국의 호스티스 단어는 어떻게 나온 걸까? 예전에 한국의 리더쯤 되는 남정네들이 해외에 나가 서양 파티에 가보니 여인들이 말끔히 차려입고 손님을 응대하는 것에 감동을 받아 한국으로 온 뒤 자기 아내를 부엌에서 해방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젊은 여자를 술집에 들어앉혀 자기들의 온갖 술시중을 들게 한 것이 유래는 아닐까 생각해 봤다.
예전엔 영어도 짧고 나눌만한 대화도 충분치 않고 문화도 낯설어 파티가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편하고 즐기게 된다. 영어가 힘겹게 늘고 문화를 이해하고 나눌 만한 대화거리를 좀 더 잘 찾게 된 것이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주인에게 초대받은 손님의 한 사람으로 그냥 내 자리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잔치도 장점이 많지만, 아줌마로 구분되는 여자인 지금 나의 처지로서는 그리 즐겁기가 어렵다. 시댁이 아닌데도 명절이 아닌데도 한국 잔치에서 나는 부엌과 거실의 경계에서 어정댈 때가 많다. 거실엔 남정네만 모여있어 거북하고 부엌엔 일을 하든 안 하든 퍼져 앉아 모여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불편하다. 팔 걷어붙이고 일할 것 아니면 차라리 거실에 편하게 나와 앉아 놀아야 하는데 이도 저도 아닌 내 주변 한국인(한국이 아닌 호주에서 사는 교민들 조차)들의 환경이 낯설고 힘겹다. 우리나라의 남녀 성평등 불균형도가 세계 최하위란 기사를 보고 내가 한국식 잔치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를 거기서 찾았다.
그 형식이 잔치든 파티든 함께 모여 있는 동안 모든 이들이 내내 웃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힘든 시기, 서로의 삶에 윤기가 조금 더 돌 수 있도록. (2009/11/5 씀)
시골 할머니들을 위한 작은 패션쇼 다과 파티.
옷을 사러 시내로 나가기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 도매업자를 불러 옷을 선보이고 판매하는 모임을 동네 교회에서 기획했다. 모임을 기획한 여전도회 할머니들은 각자 케잌을 몇 접시씩 구워왔고 정원에서 손수 키운 야채나 모종을 가져와 팔기도 했다. 준비하는 이들은 파티 전후로 엄청 바빴지만 파티 중엔 이리도 우아하게 앉아 즐긴다. 이 시간에 부엌에서 일하는 이는 없다. 간단한 패션쇼가 끝나고 원하는 옷을 사고 나면 곧이어 다과회다. 주최 측 할머니들만 몇몇 일어나 물을 끓이고 차를 서빙한다. 파티에 초대받은 할머니들은 필요한 옷 사고 동네 친구들 만나 케잌과 차 한잔 마시며 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