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는 완전한 체계의 독립된 언어
10년 전 ‘도가니’ 영화가 흥행하면서 그 내용이 이슈였는데, 사건에 연루된 청각장애자들이 당시 제대로 된 수화 통역자도 없이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었다. 수화는 그들에게 언어인데, 언어도 없이 소통하고 재판을 했다는 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지. 그 재판이 얼마나 피해자를 배제한 채 일방적으로 진행됐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암담한 마음으로, 내가 경험했던 호주의 ‘수화’ 세계가 한국과 얼마나 다른가를 얘기해 볼까 한다.
1. 대입 시험 선택 과목에 ‘수화’가 있다.
호주 청각장애자들이 쓰는 수화는 Auslan으로 불린다. 오슬란은 하나의 독립된 언어이고 수십 개의 제2 외국어 선택 과목 중 하나이다. 장애가 없는 학생들이, 불어 일어를 배우듯이 제2 외국어로 오슬란을 선택해 교실에서 정규수업으로 수화를 배운다.
2. 외국어 통번역 대학교에 ‘수화과’가 있다.
오슬란은 기본적인 일상 대화만 나눌 수 있는 장애자용 단순 언어가 아니다. 그 언어로 깊이 있는 철학과 사상 인생을 논할 수 있다. 멜번에 있는 ‘RMIT’란 대학엔 한국어를 포함한 30여 개에 달하는 외국어 통 번역 과정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오슬란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워 견문을 넓히고 다른 문화를 포용하고 싶어 하듯이 멀쩡한 호주 젊은이들이 오슬란을 택해 자신이 모르는 청각장애인의 세계를 열심히 배우며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한국으로 치자면 외국어 대학교에 중국어과 아랍어과가 있듯이 수화과가 있는 셈이다. (이미 있나?)
재미있는 건 수화도 나라마다 다 다르다는 것. 한국의 청각 장애자와 호주의 청각 장애자가 대화를 하려면 두 나라의 각기 다른 수화를 이해하고 한국어와 영어도 이해하는 이가 중간에 있어야 한다. 한 명으로 안되면 두 명 세 명의 통역자가 중간에 세워질 수 도 있다.
3. 내가 놀랐던 두 명의 청각 장애자.
남편이 다니던 대학에 뉴질랜드에서 유학 온 청각장애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었지만 정상인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말을 한다는 것 외엔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어느 날 그녀가 내게 ‘나에게 얘기할 때는 얼굴을 내게 돌려줘. 난 네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네 입을 보며 이해를 하는 거야’라고 부탁을 했을 때 정말 놀랐다. 그녀가 어떤 교육 과정을 거쳐 듣지도 못하는 언어를 말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이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강의실에서 일반 학생들과 공부도 했다. 더 놀랐던 건 그녀의 전직이었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으로 일했다는데 장애가 없는 일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단다. 그녀는 몇 년간의 호주 유학생활을 마치고 다시 그 학교로 복직했다.
청각장애가 있는 호주 목사님이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청각장애자들을 위해 목회를 하고 싶었고 일반 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3년인가 입학 때부터 졸업 때까지 학교에서는 개인 오슬란 통역사를 붙여주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할 때 무수한 졸업생 중 단 한 명인 청각 장애자를 위해 학교는 졸업식 내내 통역사를 앞에 세워 놓았다.
수화를 장애인용 언어라 제한해서 생각하면 안 된다. 사람은 성장하며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넓혀가기 마련인데 장애인이라고 해서 장애인하고만 대화를 나누며 그 안의 세계에 갇혀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반인들이 수화를 더 많이 배워 그들과의 장벽을 허물어 내고 함께 섞여야 한다.
4. 호주는 왜 장애인이 많을까?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한국 대학생이 내게 물었다. “호주엔 왜 이렇게 장애자가 많아요?” 나도 호주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똑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여러 날을 생각하다가 호주에 장애인이 특별히 더 많은 게 아니고 그들이 숨거나 갇혀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답을 나름대로 얻었다. 아침 출근길에 기차를 타도 그 바쁜 틈에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고 (이들이 기차를 탈 때 기관사들이 일일이 내려 휠체어가 굴러갈 수 있도록 발판을 놓아주고 치우고 한다.) 공원이나 미술관을 가도 뇌성마비자 다운 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이 보호자와 함께 단체로 와서 피크닉도 하고 관람도 한다.
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장애는 어느 사회의 어느 사람에게도 흔하게 있다. 그들을 가두고 분리시키지 않고 모두가 한데 나와 뒤엉켜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2011/10/5 씀)
멜번 뮤지엄 앞마당에 임시로 들어선 스케이트장. 빙판을 타는 사람들 모습이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