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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Aug 04. 2022

호주, 역사연구회와 공동묘지에 간 이유는?

모든 역사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호주 시골, 인구 5백 명의 작은 마을 스킵튼에는 박물관이 하나 있다. 수 십 년째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단계라 공식적으로 오픈을 한 것은 아니고 개별적 요청이 있을 때만 문을 연다. 초미니 동네 박물관엔 무엇이 있을까? 궁금해서 찾아가 봤다.


한때 마을의 법원으로 쓰였다던 코트 하우스(Court House)는 각종 사진들과 자료들 가구나 피아노 등으로 가득했다. 박물관 문을 열어주신 분이 가이드가 되어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150년 전 세워진 마을회관 건립 위원회의 위원들과 활동들, 마을 조기 축구회의 경기 전적과 선수들 명단, 마을 유적지, 이장 명단, 동네 교회 목회자들, 이 마을 출신 유명인사들과 족보, 새 건물이 들어선 시기, 허물어져 사라진 건물 등등.. 정말 다양한 마을의 기록들이 있었다. 이런 것도 다 기록하는구나, 보전을 했네, 역사가 되는구나, 역사가 이런 거였다니...라는 생각들이 스쳤다.


지금까지 만났던 '역사'란 왕이나 출생부터 범상치 않은 전설적인 위인들의 전쟁이나 혁명, 발명 같은 거창한 업적과 이야기들로 나와는 거리가 좀 있는 스토리였다면, 이곳에서 만난 '역사'는 지금의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사는 곳, 내 주변, 내 과거로 넓혀지는 인물이고 사건이고 배경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My story 혹은 His story가 아닌가.


이 박물관은 스킵튼 히스토리칼 쏘사이어티(Skipton Historical Society)라는 단체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말로 하면 '향토 역사 연구회'쯤이 될 듯하다. 말 그대로 이 마을의 역사를 발굴 기록 정리 보존하는 일들을 하는 자원봉사 단체인데 마을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해서 봉사도 하고 취미로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면서 마을의 유적지 보수도 하고 (안건을 만들어 지자체에 제안하며 후원도 받는다.) 마을 역사와 관련된 도서 신문 자료도 모으고, 누군가가 기부한 물건들을 걷어와 시대별로 정리도 한다. 모아놓은 자료들을 살피다 보면 100년 훨씬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 내 앞에서 펼쳐지고 혹은 살았던 인물이 살아 걸어 나오는 듯했다. 저 모퉁이 건물이 이렇게 지어졌던 거구나, 이 동네 노인들 어릴 땐 이러고 살았군, 이 사람 성을 보니 옆집 아무개랑 연관이 있나 보다 (이 동네는 알고 보면 다 친족이다. 한국의 시골처럼 사촌 팔촌 혹은 사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등등.


새롭게 마을에 대해 알게 되며 애향심도 생기고, 역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도 생기고, 나도 이 마을 역사의 한 챕터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이 마을의 첫 한국인 거주자로ㅎ. 그래서 더 성의껏 열심히 살아야겠구나란 다짐도 해본다. 그야말로 훌륭한 역사의 발자취를 후세에게 남기기 위해!


여느 집 거실만큼이나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곳의 수집된 자료들, 이곳 사람들의 활동은 너무도 흥미로웠고 지금까지 가본 그 어떤 으리으리한 박물관보다 친밀하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2009/08/24 씀)

관장님과 클럽 회원들과 전시실에서 차 한잔 마시며 놀다.

법원에서 법관들이 재판에 앞서 했다는 맹세. 맡은 의무를 최선으로 임하겠으며 항상 다른 사람을 돕고 법을 준수하기를 하나님과 여왕 앞에서 서약했다. 잉크를 묻혀 손으로 꾹꾹 눌러썼다. 오늘날에도 뭔가 서약을 하려면 이 정도 노력은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말끔하게 자판을 쳐서 프린터로 뽑기보다는.^^

이 회전의자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얘기도 나눴다. 하지만 박물관이 정식으로 오픈하면 이런 안내문이 붙을 것이다. '손대지 마시오!''앉지도 마시오!!''보기만 하시오!!!' 




어느 날인가는 이 모임에서 낡은 묘지에 새 현판을 안치한다고 해서 가봤다. 호주의 여러 마을이 그렇듯 스킵튼에도 마을 한가운데에 공동묘지가 있는데 가족들이 돌보지 못하는 묘지 중 두 개를 새로 단장한다는 것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오신 이 동네 장로교회 초대 목사님은 1858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말에 끌리는 사고를 당하고 30 시간 뒤 사망했으며 부인은 이후 아일랜드로 돌아갔다는 짧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당시엔 유럽에서 배를 타면 몇 달 동안 험난한 항해를 해서 어렵게 호주로 왔다는데 이국에서 허무한 사고로 남편을 잃은 젊은 아내는 그 먼 길을 홀로 어찌 돌아갔을까.


또 다른 한 명은 돌담을 짓는 기술자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엔 제주도 돌담과 유사한 구멍 숭숭한 돌담들이 있는데, 이 동네에서 이런 돌담을 짓던 마지막 기술자였다는 것이다. 가로 세로 자로 재고 본드로 현판을 붙인 뒤 회원 중 누군가가 1964년 마을 신문에서 발췌했다는 그의 삶에 대한 신문 기사를 담담히 읽었다. 보기에 따라 그냥 노동일을 하는 단순한 기술자로 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대단한 추모나 형식은 없었다. 그야말로 역사를 다루는 차원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본다는 정도였다. 피도 섞이지 않았고 안면도 없는 이들의 묘지를 취미로 살핀다는 것과 지역 카운실(구청쯤)에서 이런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며 공동묘지를 함께 관리한다는 것이 새로웠다.


일을 마치고 다 같이 공동묘지를 둘러보았다.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몇 대가 한자리에 묻히는 경우도 있고, 마을 사람들인지라 이 사람은 어디서 살던 아무개고 저 사람은 어떻고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묘지엔 저마다의 사연이 있어 그 짧은 묘비명 앞에서도 참 많은 사실을 알아내고 상상할 수 있었다.


가령 어떤 남자의 묘지엔 두 명의 아내가 나란히 묻혀 있었는데, 과연 이들은 무덤 안에서 편안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말에서 떨어지거나 끌리거나 밟혀 죽은 사람도 있었는데, 당시 교통수단이 말이었던 걸 감안하면 요즘의 교통사고겠구나란 생각도 했다. 또 열병으로 한가족이 일시에 몰사해 묻힌 경우도 있었고, '나의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좋은 엄마'로 기록된 여인은 고작 3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럼 난 그때부터 그 남편과 아이들의 이후 삶은 어땠을까를 그려봤다. 


그 시절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머릿속에 스며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걷다가 가끔씩 서서 나누는 얘기를 들어보면 '이 친구가 백혈병으로 27살에 죽었을 때 얼마나 놀랬는지. 이 친구 부모가 백만장자였는데, 그 많은 돈으로도 자기 젊은 아들 하나를 구하지 못하더라고..'라는 대화였다. 묘지 사이를 걷는다는 건 생각보다 흥미롭고 삶을 사색하게 한다.

 

묘지가 동떨어진 깊은 산속이 아닌 삶의 현장 안에 있다는 것도 좋다철학적으로는 죽음이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잊지 않아 삶에 겸허할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같이 살던 가족이나 지인이 가까이 묻혀있어 지나다니며 추억하기도 쉬울 테니 말이다.



역사 연구회를 더 알고 싶다면 : https://brunch.co.kr/@dreamdangee/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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