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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Aug 03. 2022

호주, 골프 클럽은 무엇이 다른가?

나와의 싸움을 평생토록 즐긴다.

스포츠에 별 재주가 없는 내가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골프를 치게 된 건 순전히 환경 탓이었다. 골프장이 집에서 가까웠고 엄청 저렴했다. 2001년 멜번에서 살던 집 근처의 골프장에서 첫 레슨을 받았다. 30분씩 6번인가를 레슨 받았는데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를 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4명으로 팀을 구성해서 갔더니, 양동이 가득 공을 갖다 주고는 대략 5분 정도 설명해 주고 배운 대로 각자 연습하도록 했다. 연습을 하는 동안 강사는 우리 사이를 오가며 개별적으로 지도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다 같이 모여 한 명씩 비디오로 찍은 뒤 자세 등을 교정해 주며 강의를 끝냈다. 남은 시간엔 무제한으로 연습을 할 수도 있었다. 너무도 성실한 강사와 강의 내용에 매우 흡족했던 기억이 난다. 싼 맛에 의욕적으로 시작해서 당시 살림 규모로는 부담이랄 수도 있는 클럽까지 큰 맘먹고 장만했지만, 사는 게 바빠 생각만큼 자주 치지 못했다. 


그땐 운이 좋아서 내가 골프장 가까이 사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호주엔 골프장이 거의 동네마다 한 두 개 이상 있어 한국의 볼링장 보다도 흔했다. 새로 이사를 가니 이번엔 골프장이 걸어서 5분 거리에 있었다. 가격도 저렴해서 주 중에는 만원만 내면 한 게임을 칠 수도 있었다. 다 가본 건 아니지만 멜번엔 2만 원 미만의 골프장도 흔했고 시설도 뛰어났다. 그때는 골프장 보다도 골프 클럽 하우스를 더 애용했다. 전세 낸 듯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탁 트인 전경을 내다보며 맛있고도 푸짐한 점심을 먹는 비용이 대략 20달러 (1-2만 원) 선이었다.


스킵튼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지난해, 프로 선수를 초대해 ‘무료 레슨’를 할 테니 모두 모여 달라는 동네 골프장 광고를 보았다. 호주 정부는 국민건강 관리 차원에서 마을 단위 클럽을 통해 이런 류의 다양한 스포츠 행사들을 주최토록 하고 재정적으로 후원도 한다. 어차피 국민을 위해 쓸 세금인데, 아픈 뒤 의료비로 쓰지 않고 미리미리 건강을 지키도록 하자는 취지이다. 

애 낳고 키우느라 창고에 몇 년간 처박혀 있던 골프 클럽이 떠올랐다. '그래.. 저 먼지를 한번 털어주자!' 아이를 데려와도 된다길래 당시 두 살 된 아들을 들쳐업고 가면서도 너무 눈에 띄면 어쩌나 걱정을 좀 했다. 근데 세상 어디를 가도 나보다 한술 더뜨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애를 둘셋씩 데려온 엄마도 있고 생후 몇 주 된 아기를 데려온 엄마도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여 레슨을 듣고 마을 사람들과 공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당시 수년간 계속된 빅토리아 주의 심각한 가뭄으로 풀이 죄다 말라 붙어있다. 밀생산과 수출이 대폭 줄었고 한국의 밀가루와 과자류 가격은 폭등했다.
골프장 옆엔 잔디볼링장. 호주에서 볼링하면 이 스포츠를 말한다. 한국의 볼링은 텐핀볼링으로 불린다.
골프장 옆의 크로키 구장에서도 마을의 크로키 클럽 멤버들이 경기를 한다.

1시간 가량의 레슨과 연습을 마치자 소세지 바베큐 저녁을 먹고 가라는 주최 측의 친절한 안내가 있었다. ‘오늘 저녁은 안 해도 된다’고 좋아하는 호주 아줌마들을 보면서 세상의 주부들은 한 끼 걱정이 무난히 해결될 때 동일한 크기의 희열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전 이 시골 골프장이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듣고 지역 경제를 후원하는 차원에서 클럽 멤버가 됐다. 25만 원이 좀 안 되는 돈을 냈고 일 년간 무제한 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한 번씩 아들을 데리고 나가 몇 홀씩 돌아본다. 

매주 수요일 오전엔 동네 여인들끼리의 컴페티션, 일종의 시합이 있다. 실력은 맨날 제자리지만, 도와줄 테니 나오라는 회원들의 당부를 믿고 그들과 같이 필드에 나섰다. 늘어난 티셔츠에 닳고 닳은 운동복을 입고 나온 젊은 애엄마, 중년의 아줌마, 할머니들 9명은 세 팀으로 나눠 경기에 임했다. 아마추어지만 구력 20-50년 이상이 기본인지라 실력이 쟁쟁했다. 나와 같이 쳤던 60대 중반의 여인은 지난주에 27홀을 도는 대회에도 출전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도전을 했는데 무려 7시간 동안 쳤단다. 매우 평범한 촌부들이었지만 시끌벅적 요란 무식하지 않았고 골프 매너를 다 지켜가며 서로를 존중하고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여유 있게 공을 쳤다.  

     

원래도 잘 치진 못하지만 주눅이 들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죽을 쒔다. 그때 그 같이 치던 여인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처음엔 누구나 다 실수를 한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골프란 세월을 두고 천천히 하는 운동이거든. 그냥 저 자연을 즐겨라. 네 앞에 펼쳐진 푸른 초원을 즐기고 나무와 숲을 즐기고 저 하늘도 올려다 봐. 그렇게 걸으면서 즐기다가 공이 하나 맞으면 그것마저 즐기면 되는 거야.” 

그 말이 위로가 됐다. 좀 전까지도 같이 치는 이들에게 너무 민폐가 되는 것 같아 다신 오지 말아야지 생각했는데 조금 더 나와서 같이 즐겨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새롭게 들었다. 공 하나에 목숨 거는 프로 선수가 될 것도 아닌데 치는 공마다 안 맞은 들 무엇이 대수겠는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악착같이 실력을 늘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슬렁슬렁 그러나 멈추지 않고 평생 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즐기며 해나가는 이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2009/8/21 씀)


지금 사는 동네엔 골프 연습을 하면서 피자를 주문해 먹을 수 있는 카페가 있다. 남녀노소가 부담없이 들러 공을 치는 동네 사랑방 같은 곳이다. 골프공 100개 치는데 대략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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