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기 Sep 06. 2023

미얀마-볼수록 믿어지지 않는 나라.

가이드북과 현실의 차이는?

지난달 미얀마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의 목적은 사람마다 가는 곳에 따라 다르기 마련인데 우리 가족이 굳이 열악한 빈국을 가려했던 이유는 지인 방문이라 할 수 있겠다. 20여 년 전 늦은 나이에 호주로 유학을 와 신학을 공부했던 알빅 목사님의 성실함과 신실함에 반해 여러 주변인들이 그의 목회를 후원했는데, 우리도 해마다 연말이면 작정한 금액을 후원하고 기도하며 우정을 나눠왔었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하고 호주로 온 그의 가족을 만나기도 하면서 언젠가 한 번은 미얀마를 가겠노라고 늘 말만 했었다. 마침 12월에 시누이의 결혼식 참가차 싱가포르를 가야 할 일이 있는 데다가 일주일쯤 여유 시간을 추가로 만들게 되어서 멀지도 않으니 들러보자고 가볍게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런데 여행 일자가 다가오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들이 하나씩 더해졌다. 아직 해외 여행객이 많지 않아 그런 건지 비자를 받는 일도 복잡했다. 캔버라에 있는 미얀마 대사관으로 여권을 보내면 비자를 첨부해서 우편으로 반송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여권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찜찜하기도 했고 군사정부가 비자 값을 비싸게 매겨 장사를 하는지라 내가 지금 어디를 가려고 하는 건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자를 받기 위한 이상한 규칙도 많았는데 가령 해외여행객은 반드시 묵을 호텔을 입국 전에 예약해야 했다. 그 이유들은 나중에 론리 플라넷 여행 가이드북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동네 도서관에 가서 미얀마 관련 서적들을 빌리기로 했다. 많지는 않았는데, 사서가 론리 플라넷 최신판을 누가 빌려갔고 출간한 지 5-6년 된 것이 있다길래, 뭐 얼마나 변했겠나 싶어 괜찮다고 빌려왔다. 이 가이드 북을 읽다가 몇 번을 울컥했다. 군사 정부가 빈한한 민간인들을 탄압하며 어떻게 관광산업을 운영하는지, 해외여행객들이 어떻게 지혜롭게 지출을 해야 하는지 등등 생각지도 못한 사회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즉, 대형 여행사와 연계해서 단체여행을 하면 뭉칫돈이 군사 정부로 흘러가므로 가능하면 소형 여행사나 개인 가이드를 쪼개서 여러 번 구매해 수익이 민간인에게 돌아가도록 주의하라는 등의 얘기였다. (여행 일정이 잡히면 여행자들의 바이블이라 불리던 론리 플라넷을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가볍게라도 꼭 읽던 루틴이 있었다. 아마도 이 여행이 가이드북을 찾아보던 마지막 시절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온라인 정보가 널려있지만 요즘도 여행 전엔 다양한 관련 서적이며 다큐멘터리며 아이와 함께 틈틈이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미얀마의 아픈 역사들, 나쁜 권력에 대항하는 아웅산 여사의 힘겨운 투쟁 이야기도 이어졌다.

아웅산 수키. 이 여인은 반골 정치인이었던 아버지의 망명 덕에 영국에서 잘 교육받았고, 영국 남편과 두 아들과 적당히 안락하게 살 수도 있었다. 골치 아픈 과거, 복잡한 세상만사 접어 버리고. 그런데 어쩌자고 이 험한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다시 뛰어들어 버린 것일까. (노벨 평화상까지 받으며 온 국민의 자부심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녀가 지금은 권력을 사악하게 휘두르며 로힝야 소수민족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무리들을 침묵으로 용인하니 인간의 나약함과 역사의 실수는 반복된다는 점이 참으로 허무하다.)


거리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나 작은 선물을 주지 말라는 당부도 가슴 아팠다. 이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음식들이 치아나 건강을 해칠 수 있고 거리에 거지를 늘리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자선을 하고 싶다면 수혜자에게 직접 주지 말고 병원이나 학교 종교 단체등의 리더에게 건네야 하고 만약 개인에게 작은 선물을 하고 싶다면 쌀가게에서 봉지쌀을 사라고 권했다.

책을 뒤덮고 있는 가난이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들. 너무도 낯선 여행 정보들을 읽으며 눈물을 훔치다가

내가 왜 여행 가이드북을 보며 우는 건가 흠칫 놀라기도 했다. 미지의 여행국에 대한 애정 때문일 수도, 한때 나의 젊은 시절을 지배했던 그런 어두운 단어들에 대한 연민이나 몰입일 수도, 아님 그냥 주접일 수도.


동네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말라리아 예방약을 한알씩 까먹으며 (여행 이틀 전부터 여행 후 이 주일 간 먹어야 했다.) 걱정인지 기대인지 모를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점점 가득해졌다. 꼭 가서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과 왜 사서 고생인가 후회되는 마음이 공존했다.


지인에게 필요한 걸 얘기하라 했더니 한사코 몸만 오란다. 그는 호주에 올 때마다 중고가게에서 옷이며 생필품을 한가득 사갔었다. 수건이며 옷이며 가방이며 노트며 집에서 안 쓰는 새 물건들을 대략 챙겨봤다. 과자류도 많이 사갔는데, 요긴하게 두루 나누어 주었다. 라면도 평소와 달리 비상식량으로 싸갔는데 이 또한 요긴하게 다 먹었다.


그런데 그렇게 도착한 미얀마는 내 생각과는 너무도 달라 깜짝 놀라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난 몇 년 사이 사회 전반에 개혁의 바람이 불어 생각보다는 부유했고 활기찼다. 수도가 양곤에서 네피도로 바뀌어 있었고 수키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벗어나 제일 야당 지도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고속도로가 새로 뻥 뚫려 바간으로의 여행은 10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어 있었다.

사람들은 초라한 행색과는 달리 점잖고 친절했는데 거지를 만난 적은 없고 어디서든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어, 이건 뭐지? 싶은 기분 좋은 황당함이 이어졌다.


나의 지인은 우리가 인터넷으로 예약한 호텔이 자기 집과 멀고 교통이 복잡해서 안 좋다며 새로 잡아 주었다.

공항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루비호텔. 일박 3만 5천 원. 컨티넨탈 조식 포함.(식빵에 잼 발라 커피랑 먹는 간단한 서양식 아침) 3층쯤 되는 건물 마당엔 토속적 초가지붕으로 만든 그늘막도 있었다.


숙박료 더하기는 잘못해도 서비스 정신은 투철한 어린 직원들은 순박하고 친절했다. 이곳엔 한국 비즈니스맨들도 많이 투숙했다. 아침식사하다 만난 티크목재를 수입한다는 어떤 분은 지난 몇 년 사이 양곤 시내에 차가 대폭 늘었다고 했다. 한국 붐이 일어서 한류문화도 인기 있고 한국 공장들도 많이 들어와 있고 당연히 한국인들도 많단다.


호텔 근처엔 놀랍게도 지인도 몰랐던 한국식당이 있었다. 미얀마에서의 첫 식사를 한식으로 하다니. 여행 중엔 한식을 갈구하기보다는 현지 음식에 집중하는데 말이다. 게다가 여행의 마지막 식사도 이곳에서 했는데 팔팔하던 아들이 막판에 장염으로 열이 끓어 힘들어했을 때 멀지도 않은 이곳에서 익숙한 밥을 끼니로 먹으며 정말 감사했다. 가격은 김밥 2-3천 원, 백반 5천 원 정도였는데, 현지 수준으로는 매우 비싼 편에 속했다.

좀 괜챦타는 쇼핑센터도 가봤다. 한국 동네 마트 수준. 그곳 음식점에 진열된 미얀마 디저트들.

고급 카페의 원두 카푸치노가 3천 원 정도였다. 이곳 서민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한 달 월급은 10만 원 정도, 좀 좋다는 학교교사 월급은 15만 원 안쪽이란다.

그러니 많은 미얀마 젊은이들이 한국이나 싱가포르 등지로 해외 취업을 간다. 참으로 팍팍한 삶이다.


주일엔 교회를 찾았다. 미얀마엔 여러 소수민족들이 많은데, 칭으로 불리는 이 민족은 해외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였고 다른 종족에 비해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좀 앞서 있다고 했다. 교회와 고아원 학교 등의 시설이 한 단지 안에 몰려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부모들이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는 경우도 많단다. 그래도 이 단지 안의 사람들 삶은 안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였다.  


조선말 언더우드 선교사등이 난리통에 글도 못 뗀 어려운 아이들을 모아다가 천막 치고 학교를 세운 것이 연세대도 되고 이화여대도 되지 않았나. 이곳의 작은 학교들은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어떻게 더 많은 밀알을 뿌릴 수 있을까?

바간 호텔방과 컨티넨탈 아침식사, 루프탑 식당에서 내려다 본 아침 풍경


거리엔 아직도 초가집이 흔했고 번듯한 양옥집도 종종 있었다. 미니 수영장이 있는 고급 주택도 있고 그 앞엔 또 행상이 있다. 어딜 가나 빈부의 차이가 문제이다. 미얀마 중산층쯤 되는 지인의 허름한 집에 갔다. 아내는 2년째 호주에서 공장 노동자로 일하고 참한 세 딸과 남편만 사는 곳이었다. 큰 딸이 기름 난로 불 하나 앞에 두고 몇 시간 동안 서서 요리를 했다. 날도 더운데.


맛있는 한상 차림은 다 먹을만했다. 일상적으로 먹는 미얀마 음식들이라는데 다만 손님을 위해 수저와 포크를 놓았단다. 손으로 밥을 먹는 일도 흔하다. 그렇게 식탁에 둘러앉아 집밥을 먹으며 지난 간 추억을 얘기하다가 앞날을 의논하다가 여행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나이도 시름도 잊고 바간으로의 2박 3일 여행계획을 세우며 신이 났다.

바간! 너무도 아름다웠던,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었던, 놀라운, 잊을 수 없는, 다시 가고 싶은 그런 여행을 하게 될 줄이야.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다가 주변을 둘러보러 나섰다.

버스 정류장. 버스가 정차하면 젊은 남자 안내원이 행선지를 큰 목소리로 외쳐댄다. 이런 사람들 빼고 미얀마에서 목소리 큰 사람을 못 봤다. 거리의 행상들도 조곤조곤 상냥하다. 느린 듯 차분한 모습도 참 점잖다.

거리에 좋은 차가 많아서 놀랐다. 에스유브이도 흔하다. 한국 일본 등지에서 온 중고차들이 많았고 중국산 신식 버스도 있었는데 중국차는 검은 매연이 잔뜩 뿜어져 나왔다. 트럭 뒤에 서서 매달려 가는 사람들도 흔했다.


난 자전거나 툭툭 사람이 무질서하게 섞여있는 동남아 거리를 상상했는데, 사람과 동물이 같이 돌아다니는 인도 거리를 기대했는데 꽤 멀쩡한 모습이다. 그러나 신호등은 없거나 있어도 지켜지지 않았고 차가 속도를 줄이지도 않아 길을 건너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전기가 부족한 나라이고 가로등이 없어서 밤길 운전은 위험하다. 인도를 걷는 일도 쉽지 않다. 엉성하게 포장되어 있는 도로는 곳곳이 꺼져있거나 솟아올라 있고 전선 다발이나 쇠꼬챙이가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어 아이와 걷기에 불안했다.


빌딩의 간판을 자세히 보면 한국 회사들도 많았다. 한국말을 하는 미얀마인들이 제법 있는데, 이곳에 진출한 한국회사들이 이들을 고용하려 애쓴단다. 그런데 이들은 한국에서 노동하던 시절만큼 월급 받기를 원하고 (우리가 렌트했던 차의 기사는 한국에서 월급 100만 원을 받으며 4년 동안 유리공장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어 한국말을 꽤 잘했다.) 한국 고용주는 미얀마 노동자 수준으로 지급하고자 해서 타협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도 한다.


양곤에서 이렇게 이틀을 보내고 짐을 꾸려 우리는 바간으로 향했다.(2015/01/07 씀-초록글은 오늘 추가한 내용이다.)


이전 10화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를 오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