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기 Aug 17. 2023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를 오르다.

핑크의 재발견

융프라우로 가는 기차안. 느긋이 앉아 풍경을 즐기고 가족과 소회를 나누며 간식도 챙겨 먹는다.

 


등반길에 만난 알파카들.

루체른에서 두 시간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왔다. 사실 루체른 인근의 리기산이며 필라투스 산을 이미 올랐기에 융프라우는 꼭 가자던 산은 아니었다. 그런데 앞서 올랐던 두 산이 매우 좋았고, 융프라우는 '유럽의 지붕(Top of Europe)'으로 불리는 스위스 최고의 산이었기에 좀 멀어도 가보자고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날씨가 아주 맑지는 않았고 산 정상에 구름이 많다해서 꼭대기까지 오르지는 않기로 했다. 스위스 파스가 커버해주지 않는 추가 비용도 만만치 않아 대신 오늘은 두 발로 하이킹을 하며 산 구석구석을 즐겨보기로 했다. 인터라켄에서 그란덴발드(Grandelbald)까지 기차로 오른 뒤 그곳에서 호수가 있는 Bort까지 등산하는 왕복 5시간 코스를 선택했다.   


지도상의 추천시간은 3시간 정도였지만 우리는 아이와 천천히 오를 양으로 넉넉히 시간을 잡았다. 참고로 스위스는 산마다 여러 하이킹 코스가 있어, 시간과 난이도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산을 오를 수 있다.

오르는 길은 그림 같았다. 달력 속의 화보 같았다. 마을이 있고 목장이 있고 구름 뒤로 융프라우 산맥 자락도 간간이 나타났다. 그래서 두리번 대고 놀며 놀며 올라가다 보니 두 시간을 넘게 올랐는데도 목표 지점의 반의 반도 못 오른 황당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스위스 산은 호주 산과는 달리 초반부터 가파르기도 했다.   

그래서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오른 만큼만 즐기기로 했는데, 그 지점에서 바라보는 세상조차도 너무 높고 아름다워 할 말이 사라졌다.   


그 산을 터벅터벅 내려오며 나름 얻은 깨달음이란, '가다가 안 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 던가 '오르지 못할 산은 쳐다보지도 말라'는 식의 격언은 전혀 수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은 무시한 채 결과만 지향하는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거나 결과에 도달하지 못할 꿈은 아예 꾸지도 말라는 편협한 현실주의적 시각만 조장하는 위험한 생각이지 않은가!  

이런 격언이 한 사회를 지배할 때 나타나는 문제적 현상이 지금의 한국이다. 성취를 해도 조급하게 치달려온 과정으로 인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도조차 않는 연약한 근성들이 자라났다. 이제 한국사회는 저 뒤틀린 격언을 국민들의 정서 속에서 솎아내어 건설적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은 결국 간 만큼 누리는데, 그곳이 어디라 한들 최선을 다했다면 부족함 없는 개인적 성취이며, 오르지 못할 산이기에 과욕을 버리고 더 열심히 쳐다보며 만끽해야 한다는 것을 이날 융프라우 산중턱에서 깨달았다. 이런 단상은 내가 융프라우를 목표점까지 등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합리화는 아니다.

어쨌든 예정보다 일찍 하산하고 보니 시간이 좀 남았다. 그래서 안내서를 뒤적이다가 발견한 또 다른 코스가  

'슈나이게 플라테'(Schynige Platte, 발음 맞나?)였다. 해발 1천 미터쯤의 산 정상까지 푸니쿨라를 타고 한 시간쯤 오르는데, 융프라우의 3대 산맥인 아이거, 몽크, 융프라우 산정상을 제일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봉이라는 것이었다.   

푸니쿨라는 옛날식 산악기차를 말하는데 어릴 때 뜻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푸니쿨리 푸니쿨라.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덴차가 작곡한 노래. 여기서 푸니쿨라는 베수비오 산에 설치된 강삭철도를 의미하는데 이 곡은 철도를 홍보하기 위해 작곡된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캠페인 송이다.-네이버) 

기억 속 저너머에 있던 어린 시절 음악 시간에 불렀던 노래가 융프라우에서 아들 손을 잡고 기차를 타는 중에 머릿속으로 튀어 오르며 잠시 묘한 감상에 젖었다.


기차를 타고 오르며 바라보는 위아래의 풍경도 멋지고 눈과 구름에 휘덮인 융프라우의 위엄도 대단하고 그 높은 산의 군데군데에서 하늘거리는 야생화들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슈나이게 정상에 있는 카페.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잊을 수 없어라. 기차표를 보여주면 커피와 비스킷을 무료로 주었다.
슈나이게 최고봉에 있는 놀이터. 융프라우 정상을 바라보며 하늘로 날아오르다.

그나저나 시소란 단어의 유래를 아는가?  영어로 See-Saw. (본다! 봤다!) 아이들이 오를 때마다 네가 좀 전에 봤던 것을 내가 지금 보고 있다고 흥분해 외치던 것이 놀이기구의 이름이 됐다. 아이와 시소를 타며 나도 외쳤다. '저 봉우리가 융프라우야, 봤니?' '나도 지금 보고 있어요' 

어릴 때 놀이터에서 생각 없이 타고 놀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 이름의 유래까지 새삼 곱씹으며 이해한다. 아이가 없었다면 타지 않았을 시소였고 생각할 일 없었을 과거였다. 아이와의 여행은 현재 진행 중이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쨌든 이곳에서 바라본 융프라우 산맥의 위용은 뭐라 말을 할 수 없도록 감동적인데 직접 오르지 않고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고 바라보니 그 느낌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세상 시름 다 잊고 신선이 된 듯 넋을 뻬고 한 세월 앉아 있었더니, 마침내 카페가 문을 닫는다고 쫓아내 마지막 기차를 타고 할 수 없이 내려왔다.   


밝은 칼라가 인상적이었던 루체른 시내 성당 내부. 하얀눈과 붉은 석양을 표현한 것이라고 혼자 해석해본다.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뭔 일인가 돌아보니 하얗게 흰 눈으로 뒤덮였던 융프라우가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핑크의 재발견? 

난 지금까지 핑크는 소녀적 취향의 귀엽거나 유치한 색인줄 알았다. 그런데 이날 본 핑크는 두 색이 뒤섞여 분홍으로 혼합된 것이 아니라 서늘하게 밀착한 채 분리되어 하얌과 붉음이 나란히 공존하는 색이었다. 

아... 세상엔 이런 핑크가 있구나. 얼어붙는 차가움과 이글대는 뜨거움. 냉정과 열정. 이성과 감성. 눈과 석양의 대립이 예리하게 날 서있으면서도 공격적이지 않고 오히려 조화를 이루면서도 평화로웠다. 호흡이 짝짝 맞는 탱고 댄서처럼 긴장되게 아름답고 세련되었고 무척 성숙해 보이는 그런 핑크의 세계를 이 저녁에 발견했다. 나는 이제 핑크색을 좋아할 것 같다. 핑크를 보면 붉은 석양을 온몸으로 맞던 하얀 융프라우가 떠오를 것이다. ( 2013/12/02 씀)



프랑스에서 기차로 넘어오며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이후 루체른으로 이동해 한 숙소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숙소를 매 도시마다 옮기려면 새로운 곳에 대한 리서치를 해야 하고 교통비도 추가로 들고 짐도 꾸리고 풀고 일이 많아진다. 취리히나 인터라켄등이 기차로 1-2 시간 거리라 스위스 파스를 이용해 무료 기차를 타면 하루 안에 충분히 다녀 올만 했다. 우리 가족은 기차 타기를 좋아했고 그 안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간식도 먹고 여행 계획도 세우며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치 숙소를 예약하니 할인도 해줘 오히려 다른 유럽 도시에 비해 비씨지 않은 가격으로 편안하게 숙소에서 머물 수 있었다. 2-3 일 쯤 드나들다 보면 오가는 대중교통이며 근처의 슈퍼나 가게등에 익숙해져 긴장감도 풀리고 내 집 같다는 안락함도 느끼는데 내가 타지에서 이런 감정으로 여행을 한다는 것이 묘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장거리 이동이 아니라면 한 숙소에 머물며 근거리를 당일 여행으로 다니는 것도 추천해 본다. 특히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수고를 많이 덜 수 있다. 

이전 09화 스위스 '필라투스', '설국열차' 타고 첫눈 맞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