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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Jul 27. 2021

호주, '부모' vs '보호자' 차이는?

이혼율 1위 사회가 주의해야 할 것들.

호주 학교에서 가정으로 보내는 통신문을 보면 ‘부모 혹은 보호자께.(Dear Parents or Guardians)’라고 수신자를 밝히고 있다. 처음엔 이유를 분명히 몰랐다. 그냥 ‘학부모님께’ 하면 될 것을 굳이 부모와 보호자로 나눈 이유를. 시간이 흐르고, 그 짧은 호칭이 나름대로 고민하고 세심하게 배려한 결과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부모의 이혼으로 친부모와 살지 않는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를 염려해서 보호자라는 호칭도 더불어 올린 거다. 할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한테, 이미 집 나가 각기 딴 가정을 이룬 부모를 들먹이며 가정 통신문을 전달하라는 게 얼마나 복잡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이혼 부부가 워낙 많고 이혼 문제를 고민한 역사도 길어 이를 다루는 사회 문화도 성숙하다고 해야 하나.        


나도 아주 쉽게 이웃집 아이 마음에 상처를 준 적이 있다. 어느 날 10살이 안된 소녀가 모임에 나와 나에게 ‘이 케잌을 먹어도 되냐?’고  묻기에 ‘엄마한테 허락받고 먹으라’ 했는데(이곳에서는 보호자의 허락 없이 남의 아이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다.), 알고 보니 엄마가 이혼해서 나간 지 몇 년 된 집이었다. 일상 중에 일어나는 이런 일들을 일일이 차단해 상처를 막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조금만 연구하면 ‘사회적’으로 드러내 놓고 상처를 쑤시는 일들은 줄일 수 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가면 ‘특별한 분을 초대하는 날(Special person’s day)’ 이 있다. 가볍게 학예회 정도를 준비해서 보여주는 행사인데, 도대체 ‘누가 특별한 사람인지?’ 옆집 엄마한테 물었더니, 몇 년 전 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는 날(Grandparent’s day)’이 명칭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들 중 조부모를 잃은 이도 있고 멀리 계셔 올 수 없는 이들도 있고 해서, 조부모란 단어를 더 이상 일반화해서 쓰지 않기로 했다는 거였다. 이로 인해 좀 더 포괄적으로 주변의 가까운 분을 초대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배려를 통해 내 아들도 잠시 느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나만 할머니께서 가까이 계시지 않다는 상실감으로부터 보호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반 아이들 모두 두 눈 동그랗게 뜬 채 호구조사를 받던 기억이 난다. 엄마 있는 사람, 아빠 있는 사람, 집 있는 사람, 월세 사는 사람, 집에 차 있는 사람 등등. 해당 학생들은 손을 들고 선생님은 무심하게 수를 세서 종이에 적었다. 그때의 모멸감으로 이 세대는 지금껏, 악에 받쳐 성공만 지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인간의 작고 민감한 감정까지 신경 써야 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치더라도, 지금은 세상이 또 달라졌다. 이혼율은 높아졌고, 사회는 복잡해진 반면, 감정은 나약해졌고, 상처의 면역력도 떨어졌다. 아님 그때는 아무도 드러낼 엄두를 못 내던 문제들이 그나마 사회가 발전해 하나씩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고 할 수도 있겠다. 좀 더 무디게 강하게 살라고 다그치기보단, 연약한 이들, 상처 받기 쉬운 환경에 처한 이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사회적으로 연구하여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이를 교육받을 필요가 있겠다. 사소한 호칭도 신중하게 붙이면 보호받는 자들이 생긴다. (2010/04/13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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