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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Jul 28. 2021

호주 초등교실에서 바라본 '교육의 개방성'

열린 교육의 현장이란?

호주 시골 초등학교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기란 일단 재미있다. 새롭고 놀랍고 의아하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들을 간단하게는 ‘교육 방식의 차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호주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게 된다고 할 수도 있겠다. 호주 사람들이 ‘왜 이런 사고를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가’ 궁금하게 여겼던 부분들에 대한 답을 초등학교 교실 안에서 하나씩 찾을 수 있어서 그렇다. ‘이런 환경에서 이런 교육을 받으며 이렇게 자랐기 때문이구나”라는 이해들. 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나는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발견을 했지만 그것들을 우선적으로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독자들이 한국 교육 안에서도 생각해볼 만한 것들을 얘기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 한국사회가 끌어안고 있는 모든 골치 아픈 문제들이 결국은 한국 초등학교 교실 안에 가도 그대로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단 ‘개방성’에 대해 2가지로 얘기해 보겠다. 


1.   열린 사고(思考) 


흔히 서양과 한국의 성교육 방법이 다르다고 말한다. 서양은 개방적으로 모든 걸 설명하는 편이고 한국은 헛기침하며 “크면 알게 될 것을..”하며 당황해하거나 주제를 바꾸거나 한다고. 물론 지금은 한국도 사정이 달라졌을 거다. 그런데 이런 개방의 차이가 성교육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교육 전반에 있다는 것이다.  

호주 교실에서 아이들은 모든 것을 질문하고 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얻는다. 수업 주제에서 벗어났다고 묵살당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고민이 진지하다면 학생이고 선생이고 같이 답을 찾아 나간다. 어떤 아이가 지난달에 배운 걸 질문해도 비웃는 사람이 없다. 배움이란 진도도 방식도 고민도 다 다른 개인들이 자기 문제를 놓고 각자 부딪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한국 교육은 폐쇄적이고 일방적이며 배움의 주체를 현장에서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릴 때, 친척 중에 맞벌이하는 부부가 어린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기고 주말에만 다녀갔다. 아이는 헤어질 때마다, 엄마 아빠를 붙잡고 가지 말라고 아우성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 주변의 어른들이 짜낸 묘책은 이런 것이었다. 아이가 엄마와 노는 동안 아빠가 몰래 집을 떠나고, 할머니가 간식으로 아이의 주의를 끄는 동안, 엄마가 몰래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사도 못하고 부모를 허무하게 보낸 아이는 바닥을 뒹굴고 간식을 들러 엎으며 난동을 부리고 울었다. 

호주 부모는 이런 경우, 아이에게(아무리 어려도) 직접 말한다. “엄마 아빠는 저녁을 먹고 떠나야 하니, 그전에 재미있게 놀자. 힘들겠지만 한 주를 잘 기다리면 다음 주에 맛있는 걸 사 오겠다.” 아이에게 충분히 설명을 하면, 한 두 번 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엔 냉정할 정도로 이해를 잘한다. 소통과 신뢰로 환경과 상황을 이해하고 배웠기 때문이다. 

가령, 이혼을 할 때 호주 부모는 가장 먼저 자녀에게 알리고, 뼈저린 상처를 남길지언정 고통과 충격을 가감 없이 함께 나눈다. “엄마 아빠는 헤어지더라도 너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으며 끝까지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다.”라는. 한국은 다 큰 자녀에게도 쉬쉬한다. 아빠는 일하러 미국 갔다, 엄마 죽었으니 찾지 마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만 하다가 침묵한다. 

배우는 자가 (학생) 자기 관심에 대한 고민과 이해에서 소외된 채, 부모나 교육자라는 이들이 주입하는 학습만 반복하는 강압적 폐쇄적 ‘훈련’의 폐해가 사회 문화로 발전하여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학력은 높아도 사고력이 떨어지거나, 자기 삶의 주체와 목적을 파악하지 못해, 주체적으로 살기보단 주변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려는 경향이 강하다. 


2.   열린 교실 


교실이 열려있다. 

1)    수업 중에 학부모가 잠시 들러 자기 아이에게 잊고 간 준비물을 건네준다. 얼른 주고 슬쩍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온 김에 반 아이들 공부하는 것도 돌아보고, 농구 게임이라도 시작하면 선생님을 도와한 게임 뛰고 간다. 

2)    교장 선생님도 수시로 들락 이며, 학생들이나 선생님과 용건을 나누곤 한다.  “아, 김 선생. 미안해요. 아까 철수가 쉬는 시간에 물어본 게 있는데, 답을 찾았어요. 지금 말해줘야, 오후에 숙제를 하겠지요.” 하는 식이다. 담임은 계속 수업을 하고 교장과 철수는 구석에서 따로 얘기한다.

3)    옆반 선생님이 쑥 들어온다. “길동이가 너무 떠들어서 잠시 이 교실에 보낼게요. 다음 쉬는 시간까지 이곳에서 자습해라.” 이곳에서는 말을 안 듣는 아이를 옆 반으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업 분위기를 헤치니 잠시 교실 밖에 보내야 하는데, 감독은 해야 하니 옆 반으로 보내는 것이다. 말썽꾸러기라도 달라진 환경에서는 장난을 계속 치기가 어렵다. 일종의 벌이겠지만, 담임 선생님도 언성 높일 일 없고, 옆반 선생님이나 아이들도 그런 일에 놀리거나 신경 쓰지 않고 각자 하던 공부 계속한다. 가령 2학년 짜리가 갑자기 6학년 교실에 오면 두리번 대다가 형들한테 한 마디씩 듣기도 하고, 모르는 걸 묻기도 한다. 반대로 5학년 짜리가 1학년 교실에 와서는 아이들 틈에서 제 인생을 돌아보기도 하고…. 

4)    그런가 하면 어느 날은 마을의 경찰관 아저씨도 노크를 하며 나타난다. 

“김 선생님, 학교에 볼일 있어 왔다가 애들 좀 보러 왔어요.” 

“얘들아,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너희 중에 요번에 동생이 입학한 경우가 있니?” 몇몇이 손든다. 

“그래, 새로 시작하는 아이들이니까 친절하게 돌봐주렴. 그럼 담에 보자”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경찰은 마을에 한 명 있는 경찰이자 학교 경찰로 아이들에게 자신을 인지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우연을 가장해서 들른 것이었다.) 

처음에는 편안하게 들락 이는 사람이 너무 많아 놀라웠고 수업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지내다 보니 이런 짧은 방문이 수업의 맥을 끊는다는 면보다는 세상 앞에 자연스럽게 열려있는 편안한 배움의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 문이 외부를 향해 닫혀있고, 누군가가 그곳을 방문할 때, 어떤 선물을 들고 갈지 무엇을 입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 또 그 공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장학사나 누군가가 온다는 이유로 평소와 다르게 포장을 해야 한다면? 한 끼 밥을 먹는 식당 주방조차도 개방하여 청결한 요리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게 흐름이라면, 교육이나 그 현장은 얼마큼 사회 앞에 철저히 열려 있어야 하는가 그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013/02/25 씀)                 


시골 초등학교 철인 3종 경기 대회. 혼자서 다 해도 되고 셋이 팀을 짜서 종목을 나눠해도 된다. 그게 공정하냐고? 각자 능력대로 뛰고 즐긴다. 아들은 친구 둘과 팀을 짜서 두어 번 연습도 대략 했다. 운동 실력은 평소 실력이고 코스를 돌아보고 경기 규칙을 익히는 정도였다. 혼자서 다하느라 열심을 내는 아이는 운동 실력이 발전할 것이고 팀을 짜서 하는 아이들은 사회성이 개발될 것이다. 일등이든 꼴등이든 참가자 모두는 박수와 환호를 넘치도록 받았다.

행사 기획부터 진행 시상까지 학부모회에서 전담, 선생님들은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다. 경기 전날부터 아빠들은 트레일러에 온갖 장비를 싣고 와 트랙을 점검했다. 

슬리퍼 끌고 학교에 와서 허벌나게 일하는 엄마들. 놀랍게도 이들은 대부분 워킹맘이다. 어떤 엄마는 육아휴직을 쓰며 임시교사로 (Relief Teacher-병가나 휴가 떠난 교사를 대체)로 일하고 어떤 엄마는 간호사라 주말마다 꼬박 날밤을 세운다. 회계사 엄마는 재택근무를 해서 근무시간이 유동적이고 사회복지사 엄마는 일주일에 3일을 일하는 식이다. 서로 육아 품앗이를 하기도 하고 데이케어 센터에 맡기기도 하고 아빠랑 교대로 일하며 육아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학교 행사엔 부모 조부모 대가족이 총출동한다. 그리고 이런 학교 행사가 한 달에도 몇 번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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