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상처로 빚어진 최고의 현대건축.
시드니를 잠시 다녀왔다. 5일간의 여행이었지만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걸렸다. 운전을 해서 가면, 멜번에서 시드니는 꼬박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부산에서 신의주쯤. 깜깜한 새벽 4시에 운전을 시작해서, 중간에 지인 집에 들러 잠시 점심을 먹고 다시 바삐 움직여도 시드니에 도착하니 어둑하다.
어쨌든 그렇게 도착하여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잔 뒤, 다음날 아침, 숙소를 나서 달링 하버, 하버 브릿지를 거쳐 오페라 하우스까지 하루 종일 걸었다. 어른 걸음으로 바삐 걸으면 두 시간 좀 넘게 걸리지 않을까..
중간중간 쉬다가 점심도 먹다가 사진도 찍다가 오늘 여정의 종착지인 오페라 하우스에 오후 4시 즈음 도착했다. 시드니는 오래전에 짧게 거주하기도 했고 이 앞도 여러 번 지나다녔지만 막상 오페라 하우스 내부를 들어가 본 적은 없었다. 적당한 공연이 있으면 볼까도 했는데, 그렇지 않아 오페라 하우스 가이드 투어를 해보기로 했다.
하우스에 등록된 전문 가이드가 건물 안팎, 무대 앞뒤로 데리고 다니며 한 시간여 동안 오페라 하우스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매우 재미있고 흥미로왔다. 하우스의 내부는 너무도 아름답고 현대적이고 실험적이어서 이게 과연 반세기 전에 설계된 건축물인가 놀라게 된다.
가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잠깐 추려보자.
1950년대쯤 시드니시는 오페라나 콘서트 등을 열만한 복합 문화공간을 짓기로 하고 공모를 시작했다.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이 응모를 했는데, 덴마크의 젊은 건축가 웃존(Utzon)도 딱 12장의 도면을 그려 보냈단다.
사실, 그의 설계는 너무도 단순해서 애초에 심사에서 떨어졌는데, 뒤늦게 합류한 미국의 모 심사위원이
이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디자인에 매료되어 밀어붙였고 마침내 당선이 되었단다.
웃존은 매우 의욕적이었지만 그의 설계는 실행 단계에서 무수한 오류가 있었고, 그때마다 세상의 한다 하는 엔지니어들이 골머리를 맞대어 대안을 수도 없이 만들어보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서서히 건축을 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아예 없던 너무도 실험적인 건물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법과 기술이 연구되고 실험되었는지를, 건축가나 시공자나 정치가들 사이에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소통과 불통의 과정이 있었는지를 가이드가 설명하는데, 전문가가 아니어도 다 이해가 된다. 설명을 쉽게 잘해줘서가 아니고,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이 건축물의 설계며 구조며 인테리어를 보다 보면 철근 하나, 콘크리트 한쪽, 타일 한 조각마다 고집과 한숨과 눈물이 골골이 젖어있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건축 예산은 이미 10배를 훌쩍 넘어버렸고 3년을 잡았던 건축기간은 10년이 넘도록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새 정권은 건축가에게 압박을 가했고 결국 웃존은 이 건물을 다 짓기도 전에 밀려나 비밀리에 사퇴하여 덴마크로 돌아갔으며 죽는 날까지 이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찾지 않았단다.
건축 과정을 보여주는 필름을 보다가 이 대목에서 놀랐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산고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기에, 어미가 낳은 자식을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는지... 게다가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데, 죽기까지 찾지 않았단 말인가..
한편으론 정치가의 심정도 이해됐다. 예산도 공기도 전혀 맞추지 못하고 실험에만 몰두하는 또라이 건축가에게 언제까지 국민의 혈세를 물쓰듯 퍼주어야 한단 말인가... 추진하기도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던 이 프로젝트는 결국 다른 건축가들의 마무리 작업과 국민들에게 복권을 팔아 모은 기금으로 어렵게 완성된다. 1973년 즈음이다.
그런데 그렇게 완성된 이 애물단지 오페라 하우스가 대박이 난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최신 건축기법에 온갖 측면에서 별별 이야기와 신기록을 세웠는데, 가령 이곳 콘서트 홀에 설치된 세계 최대 파이프 오르간은 파이프만 수천 개에 이르며 음을 조율하는데만 2년이 걸렸다거나, 극장의 의자는 척추전문 외과의사가 인체공학에 맞춰 디자인한 것이라거나, 하다못해 주차장의 천장 조차도 기둥 없이 설계된 최장의 콘크리트였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 오페라 하우스는 개장과 동시에 시드니는 물론 호주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어 한해에도 수백만 명이 공연을 보거나 건물 자체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게 되었으며 건축비를 상쇄하고도 남는 엄청난 이익을 순식간에 회수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호주 정부로서는 너무나 미안해지는 것이었다. 수차례 웃존과 화해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0년인가 낡은 건물을 보수할 필요가 생겼고 (이건 그저 화해를 위한 빌미이기는 했다.) 그를 다시 초정했다. 노년의 건축가(81세)는 이미 해외여행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노쇄해져 있었는데, 마음의 분노를 마침내 풀은(호주 측에서는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는, 역시 건축가인 자기 아들을 보내 보수를 하도록 했고, 호주 정부와 아니 자기 자식을 통해 삶의 막바지에서 어렵게 화해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건축물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가장 현대적인 건축물이며 웃존은 이 건물로 내로라하는 건축상을 모두 휩쓸어 죽기 전에 그의 명예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지은 하우스 안에서 그의 필름을 보아서 그런지 짧은 이야기였지만 매우 감동스러웠다.
공연을 준비 중인 콘서트홀이며 대극장 소극장을 일일이 둘러보았는데, (사진 촬영은 금지) 이 또한 매우 흥미로웠다. 영국의 코미디언이 대 콘서트홀을 빌려 자기 이름을 걸고 공연 중이라는 사실도 놀라웠다.
소극장(200명쯤 앉는)에서는 카바레 형식의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카바레 하면 한국에서는 퇴폐적인 무언가를 연상하게 되는데, 원래 뜻은 그렇지 않다. 그냥 가볍게 한잔 하면서 보는 공연을 말한다. 객석 한쪽에 임시로 바가 설치되고 관객석 앞엔 작은 원탁 테이블도 놓인다. 소극장 한가운데 놓인 빨갛고 좁은 무대가(오로지 딱 한 사람이 설 수 있는 크기의) 객석과 정말 가깝다. 기타 치며 노래하는 가수가 공연하기 딱 좋겠다. 저녁 공연을 준비 중이라며 바쁘게 일하는 스텝들. 또 다른 극장은 무대가 통째로 움직이는 회전 바닥을 설치 중이었다.
이건 기념품으로 산 사진집에서 찍은 콘서트홀 내부 사진. 여기서 코미디언이 공연을 한다. 코미디도 고급 예술로 대접받는다.
콘서트홀 위에서 찍은 사진. 저 유리관 이름은 어쿠스틱 클라우드. 연주자가 연주하는 음악이 홀에 퍼지기 전에 밑으로 튕겨내어 밑에서 연주하는 연주자가 자기 음악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있다던가..
시드니를 여행하는 분들은 가이드와 함께 투어를 해볼 만하다. 한국어 가이드도 한다.
(2014/02/03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