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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기 May 13. 2022

시드니, '남녀 혼숙’ 숙소에서 생긴 일.^^

성별을 떠난 개인 존중에 대하여.

조금 전 신문을 읽다가 알프스 자전거 완주를 나선 한국 남자들이, ‘남자 샤워실에 여자가 들어와 옆에서 씻는 모습에 문화충격을 받았다’고 말하는 기사를 보았다. 상황은 반대지만 나도 호주에서 그와 유사한 문화 충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어서 재미 삼아 나눠 볼까 한다. 


십여 년 전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처로 여행을 다녀오며 비행기 시간 때문에 시드니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공항에서 어찌어찌 중앙역을 찾아간 나는 그 근처의 어느 백패커 하우스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싱글이었고 저렴한 숙소를 찾아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여러 명이 공동으로 묵는 도미토리에 자리가 하나 비었다는 말에 대뜸 열쇠를 받아 방을 찾아갔다. 넓은 방에 대략 10여 개가 넘는 일인용 침대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놓여 있었다. 여행을 다니며 그런 류의 숙소에 익숙해 있던 터라 별생각 없이 짐을 풀고 바로 잠자리에 누웠는데, 수면으로 빠지려던 나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일이 생겼다. 갑자기 두어 명의 남자들이 방으로 들어와 뭔가 자기들끼리 떠들며 부스럭 대더니 다시 나가 버린 것이었다. 


잠이 달아났다. ‘내가 방을 잘못 들어온 것인가?’ 침대를 박차고 나가 방 번호며 침대 번호를 확인했다.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리셉션에서 실수로 방을 잘못 내준 것인가?’ 서둘러 내려가 물어봤다. 리셉션의 그녀는 방 번호를 확인하더니, ‘잘못된 게 없다’며 그 방은 남녀가 공동으로 쓰는 방이라고 덧붙였다. 여자들만 묵는 방도 있는데 이미 다 찼고 오늘 밤에 남는 자리는 거기밖에 없다며. 


호주엔 남녀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숙소가 흔하게 있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짐짓 태연한 척하며 다시 물었다. “어.. 그래? 그럼 그 방에 여자는 몇 명이나 묵는데…” 그녀는 숙박계를 살펴보더니, “너밖에 없네…” 이러는 거였다. 헉!


그녀는 내가 놀라는 모습에 놀라워하며 ‘그곳에 묵는 이들은 벌써 며칠째 묵는 이들인데, 안전한 젊은이들이라 우려할 일은 없을 거’ 라며 위로했다. 늦은 시간이고 낯선 도시라 어디서 다른 숙소를 구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눕는 수밖에.. 잠시 불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다행히 태산 같은 여행의 피로가 몰려와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급하게 빠져들고 말았다. 잠결에 얼핏 무리들이 들락 이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는데 난 그들이 그 방에서 잤는지 안 잤는지 기억에 없다.ㅎ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잘 만큼 자고 난 나는 다시 정신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방엔 몇 명이 자고 있을까? 일어나 있을까? 같은 생각들. 그래서 한참을 쥐 죽은 듯 누워 주변을 감지했다. 몇 명이 곧 자리를 뜬 듯했고, 사방은 조용했으므로 부시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바로 옆 침대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굿 모닝!’ 하는 것이 아니가! 

아.. 이거 다시 누울 수도 없고, 짐짓 여유 있게 ‘그래, 너도 굿모닝!’ 

프랑스에서 워킹 할러데이로 장기간 여행을 와 있다는 젊은 청년이었고, 자기 나라에서는 취업이 너무 어려워 시드니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며 여행도 다니는 지금이 좋다는 등등의 얘기를 잠깐 나눴던 것 같다. 난 눈에 뵈는 것도 없고 (렌즈를 끼지 않아) 얼른 브런치로 라면을 하나 끓여먹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었는데, 다행히 그도 일하러 간다며 곧 자리를 털고 나갔다.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는 일부러 내가 깨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멀쩡히 옷을 입고 외출 준비를 다 마친 상태에서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으니까…) 


어쨌거나 이 하룻밤의 일은 내게 매우 생경하고 충격적이기도 한 일이었는데, 그 뒤로는 이와 유사한 일들을 드물지 않게 겪어 조금씩 덤덤해졌다.  


태즈매니아 섬을 여행할 때 그곳에서 겪은 일은 이렇다. 그곳에서는 다행히 여자들만 묶는 공동 숙소에 방을 잡았는데, 거실이나 주방 일인용 샤워실은 남녀가 공동으로 썼다. 그런데 내가 만난 북유럽 사람들은 (덴마크나 노르웨이, 그 지역 문화가 다 그런 건지는 모르겠고) 특히나 개방적이었다. (호주인들이 놀랄 정도로)

가령 아침에 일어나면, 이 지역 청춘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삼각팬티에 런닝만 걸치고 나와 시리얼을 먹었다. 주방에 여러 사람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마치 자기 집에 혼자 있는 것처럼. 호주인들도 이런 모습이 놀라운지 흘끗 흘끗 쳐다보자 여자가 의식을 했는지 자기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녀가 옷이라도 하나 더 입고 나올 줄 알았는데, 달랑 수건 한 장을 들고 와 무릎 위에 올려놓더니, ‘나는 곧 샤워를 하러 갈거라 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뭐랄까, 전혀 섹시하거나(그들은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것처럼 늘씬하고 매력적인 외모였지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좀 들었다. 


남녀가 서로에게 이성적으로 끌릴 때는 몸으로 온갖 어필을 하고 소통을 하기도 하겠지만, 모든 이성이 서로에게 항상 끌리는 것은 아니고 끌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끌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서로가 복잡 미묘한 감정들로부터 담담해져서 덜 피곤하게 자연스럽게 지내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 


호주라고 다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남녀 사이의 이런 자유로움이란 어릴 때부터 다양하고 깊이 있는 교육으로 일구어 낸 성숙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한국사회가 개방적인 서구사회에 대해 섣불리 오해하거나 무리하게 흉내 내는 것과는 좀 다른, 서로의 선을 넘지 않는 ‘개인 존중’ 가치가 그 안에 있는 거라고 느꼈다. (2012/08/13씀)


-이건 그냥 여행담일 뿐 혼숙 숙소를 안전하다고 권장하거나 개방적 문화가 좋다고 장려하려는 것은 아니다. 여행자는 안전하고 소신 있게 스스로를 존중하며 돌아다녀야 한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성대결, 젠더 폭력 문제는 한국만의 역사와 사회구조 속에서 원인을 찾아야 하고 온국민이 전생애에 걸쳐 치밀하게 교육받아야만 개선되지 않을까!


지난 주 멜번 국립 미술관 전시들. 저 수박은 조각의 일부다.^^  거금 200억으로 사들인 제프 쿤스의 비너스도 입구로 옮겨놨다. 작품 감상에도 존중과 거리 유지는 필수.
멜번 야라강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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