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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르미 May 20. 2021

부부간의 대화에는 번역기가 필요하다

고집을 내려놓고 다 함께 차차차

  "한 번도 안 했잖아. 내가 다 했지."

  "한 번도 안 했다고? 참내, 말은 바로 해야지. 한 번은 했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런 말이 아니잖아!"


  "한 번도 안 했잖아. vs. 한 번은 했는데."의 대결이 시작되면 답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서로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입술은 의지와 상관없이 저만치 달려갑니다. 사실 집안일을 누가 몇 번 더 했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어느새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고 있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우리가 서로를 향해 베푸는 사랑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진 부부일수록 딜레마는 일찍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현실적인 사랑은 '갈등 해결 능력'으로 발휘되어야 합니다. 갈등 해결 능력은 곧 소통 능력입니다.


  이혼 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이 '성격 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소통 방식(표현법)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격은 원래 모든 사람이 다릅니다. 모르고 결혼한 바도 아니고요. 그런데 심각한 갈등은 소통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부는 서로 주의 깊게 듣고 말하는 '우리 부부만의 소통'을 배워야 합니다. 결혼해서 배울 게 참 많은데 이 과목은 그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억울한 사람은 말에 과장이 섞이게 되어 있습니다. "설거지 한 번도 안 했잖아. 왜 나 혼자서 다 해야 돼?"라고 내 배우자가 말한다면, 번역기를 돌리셔야 합니다. "집안일이 너무 많아서 혼자 하기는 좀 벅차요. 좀 거들어 줄 수 있겠어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런 대화가 오갈 상황이라면, 부부 양쪽 모두가 정신없이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때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한 명만 일하고, 다른 한 명은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풍경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스마트폰을 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나는 열심히 했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를 하고 있는 중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안 했잖아. 왜 나 혼자 다해야 돼?"라는 과장 섞인 푸념이 들려오면 그(그녀)는 별생각 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번은 했거든? 말은 바로 해야지."


  사실 "미안해. 힘들었지? 내가 뭘 하면 돼?"라고 말하면(차라리 가만히 있기라도 하면) 다시 행복하게 함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피곤하고 예민한 상황에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지를 고를 때가 많습니다.


  공감을 바라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팩트를 주장할 때 갈등은 격화됩니다. 그다음부터는 생각나는 대로 던지기 시작합니다. 참다 참다 말을 꺼낸 입장에서는 사실 설거지 한 번 두 번 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토론 주제가 너무 다양해지고 감정적이 되며 맥락이 실종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이게 말이야, 방귀야. 이게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반격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여성은 공감을, 남성은 팩트를.'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녀노소 대부분이 '나에게는 공감을, 너에게는 팩트를.'입니다. 그래서 상황과 관계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고, 서로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소통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로 힘들다는 이유로 "누가누가 더 힘든가, 누가누가 더 억울한가, 누가누가 더 공이 큰가, 누가누가 더 의로운가." 배틀이 시작되면, 지금 실제 힘든 것보다 체감상 수천수만 배는 더 힘들어집니다.


  잘해 보자고 꺼낸 얘기인데, 둘 다 마음이 상해서 아예 관계를 개선할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살기도 싫고, 일도 더 힘들어집니다. 여러모로 출혈이 큽니다. 반복되면 외부의 도움 없이는 개선이 어려운 지경까지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가 "나 힘들어."라고 말할 때, 그 표현이 내가 생각하는 수위를 조금 넘을지라도 지혜롭게 번역기를 돌리셔야 합니다. 보통 먼저 말하는 쪽이 (현재는) 더 힘든 상태입니다. 그래서 조금 덜 힘든 사람이 같은 말로 튕겨내거나 복수하지만 않으면 일단 호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거든."이라고 말하지만 않는다면 일단 합격입니다. 지난번 일과 그로 인한 감정을 섞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덤입니다. 이 얘기는 다음에 좀 더 자세히.




  성경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고, 화내기도 천천히 하세요." 보통은 반대로 일단 화부터 내고 말로 받아친 다음 듣는 건 버티다가 나중에 후회하면서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아아.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몰라.


  비슷한 문제로 힘들어하는 부부들을 보며, 시간과 마음이 허락하면, '부부 언어 번역기' 같은 걸 한번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나는 원래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야. 왜 나를 바꾸려고 해? 나는 나야.'라고 고집을 부리는 한 평화는 없습니다.


  영어를 못해도, 번역기를 잘 사용하면 소통은 가능합니다. 예식장에서 하는 혼인서약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생략된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의 소통 방식이 나의 그것과 다를 때에도, 온 마음을 기울여 주의 깊게 듣고 말하겠습니다."


  늘 답답하고 미련하고 쿨하지 못한 남편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많은 저희 집 평강공주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엊그제도 한 판 붙었거든요. 미안해. 말은 못 하고 여기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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