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걸음.
대학교 4학년, ROTC 동기들과 대천 해수욕장으로 떠났다. 날은 더웠고, 바다엔 해파리가 가득했지만
우리는 이른 오전부터 바다에서 첨벙 대며 대학 시절 마지막 여름을 만끽했다.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선생님(아마도 지리 과목이겠지)은 동해는 수심이 가파르고, 서해는 완만하다고 설명하며, 놀 때는 안심해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아이. 엑스 제곱을 미분하면 2x라는 것은 기억나도, 꼰 티 가득한 (지리로 추정되는) 선생님의 “서해는 아무튼 안전한 곳이야”라는 말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킬 리 만무했다.
게다가 나는 대학교 최고 학년으로 교수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후보생 2년 차였으므로 후배들의 군기가 바싹 든 경례를 받으며 2년 차의 권력에 취해 나라는 인간의 주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무언가 대단한 인간이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ROTC의 문제점은 1년 차와 2년 차의 자기 인식이 (상반된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치닫는 데에 있다.
아울러 웬일인지, 당시 나는 여차여차 장학금도 탔고, 그래서인지 ‘이 정도만 해도 장학금이야?’라는 교만에 빠져 있었으며, ROTC 입영훈련과 꾸준한 복싱으로 동갑내기 중에서도 상위 5% 안에 드는 체력을 가졌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잠언 16장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함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구절을 암송하고, 좋아했지만, 실천은 요원했다. 오후 여섯시 경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박차던 즈음. 나는 십 년도 넘은 물안경을 쓰고, 빨간 타미 수영복을 걸친 후 동기들에게 고했다. 가장 멀리 있는 빨간 부표를 터치하고 오겠노라고.
하지만 그들은 별 신경도 쓰지 않고 탱탱볼 놀이에 열중하며 “그러든지 말든지”의 투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더 자극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부러 초반부터 버터플라이(접영)로 대천 바다를 가로질렀다.
부표까지 가는 데는 10분 이상이 소요되었다. 파고가 높았고, 조악한 물안경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부표 주변에는 갈매기도 사람도 없었다.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하늘은 어둑했다. 꽤나 지쳤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부표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동시에 보는 만큼 가깝지도, 예상만큼 쉽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발 끝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 위화감은 진화의 산물이기에 대체로 들어맞는다. 어느 정도의 수심인지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한적한 주변, 짙은 구름, 차가운 수온, 그리고 부표 상단에 표기된 X 표시.
한창 나를 과신하던 시기였지만, 불안감이 엄습했다. 파고는 더욱 높아졌고, 부표에 의탁해 숨을 고르는 것도 체력을 소모하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최대한 빨리 육지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고, 가장 안정된 호흡을 할 수 있는 개구리헤엄을 구사하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탱탱볼을 쳐대는 친구들이 있는 곳을 향해 수영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중 나는 알게 되었다. 바람은 육지에서 해변으로 불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꽤 먼 거리를 10분(나중에 확인하니 15분이나 걸렸지만)만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해변으로 가는 길은 바람을 뚫고 물살을 헤쳐야 하는 더욱 고된 길이었고, 이미 체력이 소진되며 팔과 다리가 경직되기 시작했으며 헐떡대는 숨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20분 정도 지나고 허접한 물안경 사이로 해변까지의 거리를 파악한 순간 나는 절망했다.
‘아. 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했다. 이미 체력은 소진되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남은 거리를 생각할 때 해변까지 가는 건 역시 무리였다. 누군가 도움을 준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해변에서 허우적대는 나를 인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이프가드는 여대생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고, 아마 지금 시간이면 파라솔 정산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친구들은 되지도 않는 탱탱볼로 피구도 족구도 아닌 공놀이에 열중했다.
그렇게 (그나마) 남은 체력과 의지는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의지가 육체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 절망한 순간 두 팔과 다리는 바람 빠진 자전거마냥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급기야 공기 대신 바닷물이 입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이 허우적 댔다. 그리고 그럴수록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불교에서는 갈애라는 단어를 ‘더 큰 갈증을 느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인간 욕망의 숙명’이라고 규정하는데, 적어도 나에게 바닷물은 ‘이렇게 죽는구나’를 암시하는 하나의 단초로 기능했다. 바닷물을 마실 때마다 죽음에 대한 불안감이 공포로 바뀌며 그 대상이 명확해졌다.
“나는 헤엄치다 체력이 소진되어 바닷물을 과음하여 폐수증에 의해 사망한다”라는 명확한 인과관계가 주는 단념. 그래서인지 바닷물이 폐에 차는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을 선구하기에 인간이 고통(불안)스러워할 뿐이라고 했는데, 바닷물을 마시는 행위는 죽음을 선구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경험하는 중이라고 느끼게 해 준 것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죽음의 ‘무지성’과 ‘즉각성’을 깨뜨리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바닷물을 마심으로써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후에는 성난 파도에도 잘 뜨겠지),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 것이고, 이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떨쳐내는 데 유효했다. 불안보다는 공포가 낫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실용적이지 않은 생각을 할수록 몸은 점점 가누기 어려웠고, 잠시 후 나는 발차기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제 바닷물을 몇 모금만 더 들이키면 나는 의식을 잃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음을 기다리기 전에 묘한 감정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도 아니었고, 당시 애인에 대한 그리움도 아니었다. 죽기 전에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류의 소망도 아니었다. 천국은 실재 할까, 등 구원에 대한 열망도 아니었다.
죽음을 수초 앞에 둔 경우 인간은 그런 류의 감정에 빠질 겨를은 없는 듯하다. 아무튼 당시 나를 자극한 무언가 는 “그래도 한 번 저 밑이 얼마나 깊은지는 확인해야 한다” 는 의무감이었다. 형언하기 어렵지만, ‘이 절망이 정당한지 혹은 죽음에 대한 확신이 타당한지’에 대한 최후의 검토를 해야 한다는 존재자의 마지막 의식이랄까.
아니면 바닥 끝을 가보지도 않고 이렇게 죽으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회한일까. 어쨌든 마지막 순간 나를 움직인 심플한 메시지는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라’였다.
마지막으로, 정말 최후의 의지로 혼미하던 의식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발을 차며 고개를 젖혀 코를 수면 위로 꺼냈다. 비릿한 해수를 뱉어낸 후 마지막 숨을 힘껏 들이켰다. 그것은 내 일생 중 아마도 가장 인간적인, 그리고 숭고한 행위였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발을 뻗은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발바닥을 베는 느낌이 들었다. 발 끝에 튀어나온 돌이었다. 베인 발바닥이 아렸다. 아린만큼 삶의 가능성이 리얼하게 다가왔다. 그럴수록 바닷물은 짰고, 눈은 매웠다. 눈에서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나의 무언가가 현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깨달았다. 인생은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논증할 수 없지만 조건 없이 찬란하다는 것을.
나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한발 더, 그렇게 세 걸음째, 드디어 두 발이 지면에 닿았다.
내가 생을 체념한 곳으로부터 단 세 걸음.
첫걸음에 바위 상층부의 존재를 확인했고,
두 번째 걸음으로 바위를 밟았고,
마지막 걸음은 지면에 닿았다.
만약 그 한 발, 한 걸음을 내딛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나는 죽었으리라.
그리고 그 때,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어찌 됐건 살아야 한다. 가장 소중한 건 목숨이다. 그 다음 일은 그때 어떻게든 해결하면 된다.” 는 것을.
십수년이 지난 지금, 내가 이 체험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이 삶에 대해 초연하고자 하지만, 초연과 체념은 열정의 또 다른 레토릭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하겠다. 아마도 이런 말이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면까지의 거리는 내가 삶을 체념한 곳으로부터 단 세 걸음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