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걸까? 욕망하는 걸까?
추석연휴 끝 무렵에 둘째 아이가 친구들과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바이킹을 여러 번 탔다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몇 달 전 수학여행에 가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무서운 롤러코스터도 타고 왔던 아이다. 엄마는 겁이 나서 못 탔을 텐데 정말 대단하다고 치켜세워줬더니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참 예쁜 나이다. 스릴을 즐길 줄 아는 나이.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만끽하는 것일까?
어렸을 때는 나도 그런 놀이기구를 잘 탔다. 놀이동산에서 시시한 회전목마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고, 줄이 얼마나 길더라도 스릴을 만끽할 수 있는 어트랙션만 골라 타고 또 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그런 놀이기구가 무서워졌고, 심지어 대관람차를 타는 것도 꺼리게 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에 가면 나는 언제나 짐을 지키는 사람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나이를 먹으면 겁이 많아지는 걸까? 죽음이 더 두려워지는 걸까? 죽음이 두려운 건 삶을 사랑하게 되어서일까?
죽고 싶다를 입에 달고 살던 30대 때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살아있음에 만족하고 있다. 자꾸 더 살고 싶어진다.
이건 삶에 대한 사랑일까, 욕망일까?
죽음을 생각하면 아까운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손에 든 것이 많아서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유지하고 싶은 삶이 있고, 꿈꾸는 미래가 있다. 이 중 무엇하나라도 없다면 내가 삶을 유지하고 싶어 할까 생각해 보면 고개를 젓게 된다. 한없이 유약한 나는 그 세 가지 중 한 가지만이라도 보장되지 않는다면 삶을 귀찮아할 게 뻔하다.
그렇다면 이건 삶에 대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 그저 욕망일 뿐인 거지. 살아서 누리고 싶다는 욕망. 그래서 자꾸 죽는 게 두려워진다. 롤러코스터도 무섭고, 대관람차도 무섭고, 비행기 타기도 무섭고, 운전하기도 무섭고, 길 가다 비명횡사할까 무섭다.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붙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사랑하는 것.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 살아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감각과 사유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래서 좀 '잘' 살아보려 하는 것 말이다.
종일 침대에 누워 핸드폰만 뒤적이다가 가족들의 위치를 확인한다. 학교와 학원에 있는 아이들, 거래처에 있는 남편, 그리고 침대에 누워있는 나. 부끄러워진다.
'롤러코스터'를 두려워하는 건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손에 든 것에 대한 욕망일 뿐이다. 게으르게 굴지 말고, 귀찮더라도 긴 줄의 끝에 서보고,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안전바를 내리고, 살아있음을 만끽하며 비명을 지르는 것. 그런 게 삶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책상 앞에 앉는다. 글을 쓴다. 그런 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