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아닌 소리
“학씨!”
학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부라린 눈, 치켜올린 손과 세트가 되는 소리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텔레비전에서 저러고 있다. 욕쟁이 할머니가 인기인 것처럼, “학씨!”하는 그가 재미있다고 사람들이 웃는다. TV 채널을 돌릴 때마다, 유튜브 숏츠마다 그가, 그를 따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학씨!”거리고 있다. 나만 재미없나.
최근에 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제주도의 어린 연인이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정성으로 키우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드라마다. 많은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개성과 스토리로 사랑받고 있는데 그중 '부상길'이라는 캐릭터도 인기가 많다. 돈은 많지만 자존감은 없는 부상길은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늘 관식을 시샘하고, 아내인 영란과 자녀들을 홀대한다. 겉으론 강한 척 하지만 내면은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고, 그 외로움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학씨!’를 내뱉는다. ‘말’이 아닌 ‘소리’. 마치 동물이 상대를 경계하며 내는 하악질과 비슷하다.
사실 부상길 역을 맡은 최대훈 배우는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어느 극에서 어떤 캐릭터를 맡아도 찰떡처럼 소화하는 감초 같은 사람이다. TV를 보다가 최대훈 배우가 나오면 채널을 멈추고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워낙에 캐릭터 소화력이 좋은 사람이라 그런지 '학씨!'도 맛깔나게 소화한 모양이다. 그 장면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밈으로 계속 SNS세상을 떠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마다 그 소리를 흉내 내는 연예인들이 많고, 심지어 최대훈 배우는 그 캐릭터의 말투를 살려 광고까지 찍었다.
하지만 난 그 '학씨' 소리가 많이 힘들다. 좋아하는 배우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만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표현, 아무렇게나 자기의 화를 토하는 사람, 가족을 가장 만만히 여기고 자기의 화풀이 상대로 삼던 사람. '학씨'를 수시로 내뱉던 사람이 내 가족 중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캐릭터가 왜 사랑을 받고 그 장면이 어째서 밈으로 도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잊고 살았던 기억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배우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오르게 된다. 한동안은 사람들이 부상길을 안쓰러워하는 방식으로 이해해보려 했다.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 그랬을 거라고.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 거라고. 하지만 부상길이 내뱉는 소리에 소름이 돋는 나를 보면서 다시 깨달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꼭 이해해야 하는 건 아니다.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모두 같은 표현방식을 가지지는 않는다. 사람은 스스로 느끼고 깨우칠 수 있는 존재이며, 내가 아프면 상대도 아프다는 걸 알만한 인지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그 긴 세월 동안 스스로를 바꾸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까지 내가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다.
나만 이런 경험이 있지는 않을 텐데 하는 염려도 든다. 지금의 나는 그와는 다른 생의 궤도를 탔지만 어느 누군가는 아직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테고, 또는 여전히 그 말이 아닌 소리 속에 갇혀서 살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밈을 보며 시시덕거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히고 힘이 들까.
제발 더 이상 TV에서 SNS에서 그 얼굴과 그 소리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는 가볍고 재미있는 영상이 아니라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영상이라는 걸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한다. 좋아하고 따라 할 만한 건 그것 말고도 세상에 넘친다. 최대훈 배우도 예전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학씨!’는 이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