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공무원을 아느냐
공무원 20년 차인 H 씨는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6급 공무원이다. 주말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워라벨 생활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사무관 승진을 위해서는 본부로 올라가야 하는데 가족과 떨어져야 하고 매일 늦은 야근과 업무적 스트레스받을 것을 생각하니 승진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H 씨는 승진을 포기하고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워라벨을 즐기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가족을 두고 본부로 올라가 격무에 시달리면서 사무관 승진에 도전해 보는 것이 좋을까.
요즘 워라벨만 할 수 있다면 사무관 승진을 포기하겠다는 공무원들이 많이 있다. 근무 희망 부서도 업무량이 많은 회계나 집행, 사업 부서 보다 업무량이 적은 지원부서를 선호하는 경향도 두드러진다.
이들은 사무관 승진보다 신분과 정년이 보장되는 공무원의 강점을 활용해서 부서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공직은 사무관이 목표가 아니고 아늑하고 안락한 삶이 목표인 셈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가정 지향적이고 안락한 자기 계발 삶에 대해 누가 정반합을 제기하겠는가. 어쩌면 사회의 또 다른 삶의 양상 일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겪었던 사무관의 생태계에 대해 조명을 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공직에서 공무원의 직급을 크게 나누면 사무관인 5급 이상과 주무관인 6급 이하로 구분한다. 사무관과 주무관은 간부와 비간부로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하고, 고위직과 하위직으로 나누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공무원 중 사무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의 경우 정원이 866명이다. 이중 5급 이상은 59명이다. 92% 이상이 6급 이하인 셈이다. 소방 공무원의 경우는 사무관에 해당하는 소방령급 이상이 4%다. 소방 공무원 중 96%가 6급 이하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지방직의 경우 정무직을 제외하면 사무관 이상의 비중은 기관별로 5%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무관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듯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민주당 박재호 의원이 분석한 자료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무관 승진 기간이 세종시가 17년으로 가장 짧았고 전남이 28년으로 가장 길었다. 평균 승진 소요년수는 25년 4개월이었다.
내가 아는 국가직 선배 중에 9급으로 시작해서 3급 부이사관까지 올라가신 분이 있다. 그분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뻤을 때가 언제였냐고 직선적인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그 선배는 사무관 승진할 때였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공무원의 로망이 승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다수의 공무원들은 어쩌면 사무관 승진을 위해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먼저 5급 사무관과 6급 주사의 차이부터 살펴보자. 바로 '벼슬 관' 자가 붙느냐 붙지 않느냐의 차이다. 사무관 이상은 '관'자가 붙는다.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등이다. 이 '관'자가 붙으면 족보에 오른다. 지방을 쓸 때 현고학생부군신위가 아닌 현고사무관부군신위라는 고인의 직위 란에 '사무관'이 들어가는 것이다.
실례로 6급으로 퇴직하신 지방직 공무원이 있었다. 이 공무원의 꿈은 족보에 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무관 퇴직으로 허위서류를 조작해 종친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동족 부락이다 보니까 그 공무원이 6급으로 퇴직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누군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결국 그 공무원은 체포되어 허위 공문서 위조가 아닌 허위 공문서 변조로 법의 심판을 받은 일이 있었다.
또, 사무관을 달면 공직뿐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혹은 가정에서도 달라진다. 우리 집 아들의 이야기다. '너네 아빠 뭐하셔?' 친구들이 물었을 때 6급 이하였을 때는 '공무원' 대답을 했는데 사무관 승진을 한 후로는 '중앙부처 사무관이셔'라고 절대 꿀리지 않게 대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무관으로 승진을 하면 봉급이 파격적으로 오른다. 지방직의 경우 관리수당을 포함하여 7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오른다. 공무원은 승진을 할 때마다 봉급이 오르지만 사무관 승진할 때의 인상률이 제일 높다.
사무관을 달면 기관장을 할 수 있다. 국가직의 경우, 관운이 좋으면 행안부 예하기관의 기관장을 할 수 있고 지방직의 경우 동장이나 면장, 소속기관의 장을 할 수 있다. 설령 기관장을 하지 않더라도 부서의 장으로서 결재권과 인사권, 예산집행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직원들이 바라보는 사무관과 6급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사무관 승진을 하면 일부 집무실이 주어진다. 지금 국가직인 나도 집무실을 갖고 있다. 집무실 안에는 소파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정수기도 있고 TV도 있다. 심지어 양치와 손을 씻을 수 있는 세면대도 설치되어 있다. 자기만의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국가직 사무관에 대해서 살펴보자. 국가직의 경우는 지방직과 다르게 사무관이 계장직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아니 계장직도 아니고 실무 업무를 보는 경우도 있다. 팀장제로 운영하다 보니까 심지어 서기관도 실무를 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국가직의 사무관이라는 직급이 희석될까. 그렇지 않다. 같은 실무를 보더라도 사무관과 주무관은 사실상 격이 다르다
먼저 사무관과 주무관의 차이는 공통 행정을 누가 하느냐의 차이다. 말이 공통 행정이지 잡무다. 주간업무 자료, 여비 정리, 행사 진행, 전산 지원, 보안 담당, 환경 정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이 업무를 주무관들끼리 나누어서 처리한다. 주무관들한테는 담당업무보다도 이런 보조 업무가 더 많은 경우도 있다. 사무관은 이런 공통 행정에서 제외되어 본연의 정책업무와 사업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감사와 수사를 받을 때에도 사무관이라는 계급은 유리하게 작용을 한다. 감사원 감사를 나오면 감사반장은 사무관이고 감사 반원은 6급 이하다. 감사관도 계급이 있는 사무관한테 좀 더 존중을 해준다. 공직에도 엄정한 직급이라는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감사원 감사를 받을 때에도 감사원 감사관이 사주는 저녁을 먹고 술을 한 잔 할 수 있었던 것도 사무관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받을 때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첩보와 물증이 없는 이상, 수사과정에서 사무관의 직위는 그나마 그들에게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9급 공무원들에게 있어서 사무관은 공무원의 꽃이라 부르는지 모른다.
실례로 내가 근무하는 지방 기관에서 발생한 일이다. 매사에 달망지게 업무를 처리했던 6급 여직원은 사무관 포석을 깔기 위해 세종 청사 본부를 지원해 갔다. 만약 그 여직원이 데면데면한 구석이 있거나 요령부득이었다면 세종 청사에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가더라도 승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여직원은 오늘도 사무관 승진을 하기 위해 음울한 야근을 하면서 가족이 있는 고향을 바라보며 삼매에 눈물 지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다보니 너무 사무관 예찬을 피력한 것 같다. 나는 지방직 근무를 해 본 적이 없다. 국가직도 몇 개소의 기관에서만 근무를 해 봤다. 이것은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정치적 가십이 십분 들어갈 수 있고 내 이야기가 국가직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에는 일부 뇌피셜이 들어갔음을 나도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