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다 보면 한국의 맛이 그리울 때가 많다. 싱가포르 곳곳에 한식당이 있어서 회나 매운탕, 자장면이나 짬뽕 같은 음식들은 언제든지 사 먹을 수 있지만, 한국의 특정 계절에 먹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을 사 먹기는 힘들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통화하다 보면 가끔 제철 음식을 먹은 이야기를 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 맛이 생각나서 입안에 군침이 돈다. 꽃게찜, 생굴, 호박잎쌈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인데 제철에 먹는 즐거움을 느낀 지 오래되었다. 일 년 내내 여름인 싱가포르에서 한국의 특정 시기와 계절에만 먹을 수 있는 제철 음식을 맛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요즘 싱가포르 현지 슈퍼마켓에서는 몇 가지 한국산 채소와 과일을 수입하여 판매한다. 한국의 봄에는 딸기를, 여름에는 복숭아와 참외를, 가을에는 사과와 배를, 겨울에는 감귤을 살 수 있다. 한국산 딸기는 싱가포르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아주 많아서 가격이 비싼데도 잘 팔리는 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제철 과일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이곳에서 살 수 있지만, 제철 채소를 구하기는 어렵다. 콩나물, 애호박, 가지, 깻잎, 청양고추, 꽈리고추 등은 이제 현지 슈퍼마켓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봄동이나 포항초와 같은 제철 채소는 여전히 찾기 어렵다. 남편이 한국 출장을 다녀올 때, 어머님께서 보내주시는 덕분에 가끔 맛볼 수 있을 뿐이다.
며칠 전, 내가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한국슈퍼마켓에 물건을 주문하려고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채소와 과일이 신규 입고 된다는 알림이 있었다. 이곳은 가락시장에서 출하되는 채소와 과일 몇 종류를 항공 직송으로 받아 판매하는데, 가격은 비싸지만 신선도가 좋은 편이다. 때로는 한국의 봄이나 겨울에 먹을 수 있는 제철 채소도 판매하기 때문에, 사이트에 있는 알림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 그날 알림은 평소 구하기 어려웠던 냉이, 달래, 포항초와 같은 봄 제철 채소가 곧 입고된다는 것이었다. 이런 제철 채소는 하루 이틀 사이에 품절이 되기 때문에 나는 알림을 보는 즉시 종류별로 채소를 주문했다.
배송받은 채소
이틀 후, 주문한 채소를 배송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종이 상자를 열어 보니 채소는 종류별로 각각 투명한 비닐에 포장되어 있었다. 맨 처음 냉이 두 봉지를 꺼냈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많았고, 누렇게 시든 잎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적상추를 꺼냈다. 차곡차곡 잘 넣어 두어 상한 잎이 하나도 없었다. 달래를 꺼냈다. 흐트러지지 않게 고무줄에 묶여 있었다. 오이고추를 꺼냈다. 초록빛 꼭지가 싱싱했다. 포항초를 꺼냈다. 짙은 녹색 잎에 연분홍빛 뿌리가 싱싱하게 보였다. 고구마를 꺼냈다. 흠집이 적고 색이 예쁘며 단단했다. 마지막으로 콩나물 한 봉지를 꺼냈다. 식탁에 쭉 펼쳐놓고 보니 마치 한국의 하나로 마트에 가서 장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분주했다. 나물 반찬을 하려면 손이 많이 가니 조금 서둘러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손질하기 번거로운 냉이부터 다듬었다. 비닐봉지 속에 들어 있을 때는 깨끗해 보였는데, 꺼내 보니 군데군데 흙과 이물질이 묻어 있었다. 잠시 물에 담가 둔 후 흐르는 물에 여러 번 흔들어 씻었다. 뿌리와 잎 사이에 붙은 흙은 칫솔로 제거해 주었다. 냄비에 쌀뜨물을 넣고 된장을 풀어 준 후, 깨끗이 손질한 냉이를 넣고 냉이된장국을 끓였다. 국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자 부엌은 어느새 향긋한 봄냄새로 가득 찼다.
포항초는 뿌리 부분에 흙이 많이 붙어 있어 흐르는 물에 여러 번 반복해서 씻었다. 소금을 넣고 살짝 데친 후 국간장을 조금 넣고 무쳤다. 오이고추는 작게 잘라 된장 양념을 만들어 무쳤다. 콩나물 무침도 하고 고구마도 쪘다. 진보라색 껍질 속 노란 속살이 돋보였다. 잎이 야들야들한 상추도 깨끗이 씻어 물기를 제거했다.
봄내음 풍기는 밥상
식탁을 차렸다. 요리하는 데 시간은 걸렸지만, 검은콩을 넣은 잡곡밥과 냉이된장국, 포항초무침, 콩나물무침, 오이고추무침, 상추, 찐 고구마를 상에 차려 놓으니 너무나도 뿌듯했다. 봄 향기 가득한 상차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서둘러 밥을 먹었다. 쌉쌀한 냉이, 달큼한 포항초, 아삭한 오이고추, 부드러운 상추. 달달하고 촉촉한 고구마. 고기반찬 하나 없어도 너무나 맛있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봄맛을 즐기다 보니 잃어버린 한국의 맛을 찾은 것처럼 기뻤다. 제철을 맞은 한국산 포항초는 별다른 양념 없이도 재료 본연의 맛이 좋아 이곳의 시금치와는 맛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제철에 나오는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크다는 걸 한국에 살 때는 몰랐다. 그래도 처음 싱가포르에 왔던 18년 전과 달리, 이렇게 가끔씩이나마 제철 채소를 사서 요리해 먹을 수 있으니 참 감사하다. 오늘 나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의 봄을 맛보았다. 냉장고에는 아직 신선한 달래가 남아있다. 내일 저녁에는 콩나물밥을 해서 달래간장을 넣고 비벼 먹어야겠다. 우리 집 식탁은 다시 한번 향긋한 봄의 향기로 물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