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기억한다.

다정한 글쓰기 모임 첫번째 과제

by 두두

나는 기억한다. 근데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기억한다는 건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빛바랜 어떤 순간을 더듬거리는 느낌이다.


어렴풋하게라도 떠올리고 싶은 장면은 사진작가를 꿈꾸기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때의 어느 날이다.

아버지는 오빠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의 모습을 연대별 순으로 찍어 가족사진 앨범으로 정리해 두셨다. 덕분에 내가 기억하는 모든 유년 시절의 모습은 아버지표 사진 앨범에 실린 네모 프레임 안에 정지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사진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커졌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상의 면면을 기록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고향 같은 동네를 벗어나 중학교 2학년 새 학기 시작 1달 뒤, 서울의 건너편에 있는 지역으로 이사 오면서부터다. 새로 이사 온 집 뒤에는 야트막한 둔덕을 낀 공원이 있어서 꽃이 필 때면 꽃을 구경하고, 겨울이 오면 눈 쌓인 놀이터에서 소복이 쌓이는 눈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점점 일상을 기록하는 일에 관심을 보이자, 아버지께서는 간직하시던 카메라를 내게 주셨다. 할아버지께서 청년 시절 찍으시고 아버지가 물려받았던 탄탄한 바디의 Pentax MX 카메라였다. 새로운 동네에서 새 관심사를 탐험하러 여기저기 쏘다니기에 이 카메라만 한 물건이 없었다.


카메라는 기스를 막기 위해 낡은 검정 가죽 케이스 안에 담겨있었는데, 카메라 가게에 비슷한 사이즈의 케이스 재고가 남아있었는지 빤짝빤짝한 새 케이스를 구할 수 있었다. 무척 오래된 물건이라 카메라에 새 옷을 입혀주는 것만으로도 새것이 된 것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싶은 마음이 한껏 부풀어졌다.


멀리 있는 사물도 조금 당겨서 볼 수 있는 30mm 단렌즈도 달고 있었다. 단짝 친구처럼 어디를 가도 데리고 다니면서 한쪽 눈은 찌푸리고 다른 한쪽 눈만 뜬 채 뷰파인더 너머를 바라보며 뿌옇던 화면의 초점이 맞도록 조절했고 ‘이때다!’ 싶은 순간을 찍었다. 매번 작지만, 선명한 ‘찰칵’ 소리가 났다.


첫 카메라를 아버지께 물려받고 나서 즐겁던 2학년을 지나 돌연 폭풍같이 공부하는 학창 시절이 시작됐다. 입시를 하던 7년을 통틀어 학업 이외에 내 감정을 표현하도록 창조성을 지켜주던 것은 바로 이 카메라와 필름 사진들이다. 사진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겨났지만 부모님은 국제 변호사가 되길 원하셨다. 꿈이라는 건 간직할수록 큰 원동력이 되었고 부모님의 바람과 나의 욕망을 절충하기 위해 대학도 두군데를 동시에 다녔다. 두 배 이상의 노력을 했지만 사진작가도 국제변호사도 어린시절의 ‘장래희망’으로만 남게 되었다.


여전히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은 내가 항상 돌아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었고, 방금 깨달은 사실인데 신기하게도 처음 대학 지원 입시 원서를 쓸 때도 ‘사진’을 매개로 한 작문 에세이를 써서 냈었다. 쓰는 행위는 사진을 찍는 행위처럼 나를 이루는 중요한 조각 중 하나이다.




한글을 초등학교 2학년때 쯤 때면서부터 글쓰기를 꾸준히 좋아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적었던 손바닥만 한 노트,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미니 자물쇠가 달린 우정 다이어리, 학교 시절에 소위 말하는 일진들한테 괴롭힘을 당하면서 작성했던 일기장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때의 글들을 다시 읽어볼 생각은 못 했다. 분명 즐거웠던 순간들도 많이 썼을 텐데 사진과 달리 글은 행복한 일들보다 슬펐던 일들이 더 떠오르기 때문이다. 왜일까?


어린 시절 어머니 아버지가 주셨던 무한한 사랑에 너무나 감사하지만, 맞벌이 부모 아래에서 자라면서 느꼈던 소외감과 쓸쓸함은 무시하려고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어떤 근원으로 존재한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들어준 적이 없다고 생각하던 어린 시절 기억이 나의 결핍이자 내 창작의 뿌리이다.


어릴 적 나는 놀이터에 가도 두꺼비집을 짓고 혼자 놀았다. 요새 5살, 6살 조카들을 보면 자기 할 말 다하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활발하게 소통하며 지내는 모습이 대리만족이 될 만큼 유년시절 ‘놀이’에 있어서는 혼자였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다른 친구와 손뼉 치며 놀아본 적이 없어서 쎄쎄쎄가 뭔지 어리둥절한 채로 입학했었다. 태어나서 중학생 때까지 줄곧 살았던 아파트에서는 동네 오빠 언니 동생들이 우다다다 복도 앞을 뛰어다닐 때 조용히 티비 앞을 지켰다.


천성이 타고나기를 조용한 아이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모임을 좋아하고 쾌할하다. 사람들을 만났을 때 생동감 있는 리액션을 하는 소위 말해 E 성향의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이런 성향을 자신있게 내놓지 못했던 것이 남모르는 콤플렉스일까? 남부러운 것 없는 유년시절, 학창시절을 보내면서도 진짜로 원하는 걸 자신있고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기보다 남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관찰하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다가도 방향을 틀기가 일쑤였다.


원했던 것이 선명하고 단순했던 첫 카메라 이후 거의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하나의 결심을 한다. 모두가 선망하는 트랙에서 벗어나 정해진 길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기로. 답을 알지 못해 어두침침한 터널을 지나가지만 더듬거리며 나아가기로. 정해져 있는 달리기 트랙 같기도 한 삶의 단계들을 열심히 밟을 때와 달리 진짜 속마음, 창작하며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진처럼 선명하게 펼쳐서 내보이고 싶어진다.


그 누구도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가르쳐 줄 수는 없다. 나 자신조차도 내 솔직한 마음들을 애써 들으려 한 적이 없기에 이대로라면 작고 여린 목소리를 한 이 어린아이의 진심은 영영 묻힐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서툴지만 나만의 세계로 가는 길을 걷는다. 안정적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하고, 내가 궁금해하던 새로운 일을 도전하고, 지금은 또 내 이야기를 독립 잡지의 일종인 진 zine으로 만들고 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소통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하다 보면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가닿는다.


누군가의 눈에는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남의 눈치를 보며 작아질 때가 수도 없이 찾아온다. 일례로 내 길을 걷겠다고 결심한 뒤에도 계속해서 ‘너무 추상적인 거 아닐까, 돈을 벌어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뒤처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질문을 되뇌고 곱씹는다. 또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일을 하지 않으면서 여유를 가지며 사는 게 가능한 이유는 이미 갖춰진 충분한 여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반문도 할 수 있다.


의문의 눈초리와 목소리가 들릴 수록 더 정신을 퍼뜩 차려야한다. 다정한 글쓰기 모임을 새로 시작했는데 이 커뮤니티를 빌어 꺼내 보이고 싶은게 있다. 나조차도 정확히 짚어낼 수 없지만 내 안에는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과 ‘글과 사진, 나의 창작물로서의 결과물을 내보이는 것’ 사이에 끼어있는 불편한 이물감이 존재한다. 내 안에 변화가 절실하다.


중학생 시절의 순수한 열망으로 시작했던 창작에 대한 불씨가 10대, 20대, 그리고 30대를 거쳐 세상의 빛에 바라고 있다. 하지만 케이스를 갈아 끼우자 새로운 카메라처럼 여겨졌던 Pentax MX처럼, 대를 이어서 전해진 이 카메라처럼, 나의 창작의 뿌리를 마치 새것처럼 다뤄본다. 초점을 조절하고 내 안에 담긴 이야기를 꺼내서 ‘찰칵’하고 정지시킨다. 오래됐지만 동시에 어린 이 마음을 귀 기울여 듣는다. 한때 결핍이었던 감각을 켜켜이 들춰내어 새로운 느낌으로 더듬거릴 수 있도록 쓰고 기록하고 또 기억한다.

keyword
이전 05화시간은 나선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