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글쓰기 모임 두번째 과제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의 겨울, 방광암 3기 진단을 받으셨다. 대학 입시 원서를 넣기 전인 2학년 겨울방학에 입원하시게 되었는데 홀로 집에 있게 된 나는 남자친구를 불러 함께 있었다. 삐삐비빅.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부리나케 들어왔다. 그렇게 경황없이 서두르던 이모는 처음 봤다. 엄마 없이 이모만 집에서 뵌 것도 처음이었다. 이모가 아버지의 수술 때 필요한 옷가지를 챙기러 온다고 엄마가 말했던가? 짧은 순간 기억을 되짚었다.
아버지께서 아프셔서 부모님이 병원에 가계시지만 고3이 벼슬도 아니건만, 집에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기습방문으로 알게 된 나의 발칙한 행위-아버지께서 병마와 싸우기 시작할 때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사귀는지도 몰랐던 남자친구를 불러낸-를 이모는 비밀로 해주셨다. 말로 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들었다. 이 기억은 나 자신이 얼마나 유약한지, 외로운지 알려주는 사건이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큰 수치심이 들었고 머리 저편의 무의식에 묻어버렸다. 난 아무도 모르게 다시 혼자 알아서 잘하는 딸로 돌아갔다.
수술이 끝나고 아버지는 간이 방광이 든 주머니를 항상 들고 다니셔야 했다. 수술 후 얼마 안 있어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예정대로 난 입학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고, 오빠도 집을 떠나 일본에서 공부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독한 싸움을 옆에서 돕는 방법이라고는 열심히 학교에 다니고 최대한 그곳에서 잘 지내는 일이라고 신신당부를 받았다.
이따금 어머니한테 이메일이 왔다. 매일매일 걷는 일지를 보내오셨다. 간이 방광 주머니를 옆에 차고 오늘은 평지를 걸었다. 다음 날은 조그마한 언덕을 올랐다. 그 다음 다음 날에는 야트막한 비탈이 있는 산을 올랐다. 절망적인 가족들과 달리, 환자인 아버지는 매일 나아지도록 꾸준히 두 발로 뚜벅뚜벅 걸었다.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미리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 주셨다. 덕분에 매 학기 끝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옆에 있게 되도 내가 아버지를 위해 해드릴 일은 딱히 없었다. 아버지 성격답게 자식들이 외국에 있든 같은 땅에 같이 있든, 무엇하나 요구하시는 일 없이 당신의 하루치 걸음을 걸으셨다. 나아지기 위해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애쓰셨다.
집안에 작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매일 식탁에는 데친 브로콜리, 얇게 썬 토마토, 우엉조림, 뿌리채소 반찬들이 올라왔다. 음식의 간도 슴슴해졌다. 설탕은 마약인 마냥 절대 손도 안댔다. 재료 본연의 맛으로 꼭 샐러드를 만들어 먹었다. 아버지는 자상하고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시는 분이셨다. 이런 아버지 많이 없다고 듣고 자랐는데 행운이라 느낀다. 아버지께서는 주에 1번은 마트에 가셔서 원재료를 담고, 야채칸과 과일칸을 항상 넉넉히 채워두셨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와서 재료를 깔끔하게 다듬고 소분하며 손질하셨는데 이 일련의 행위들이 마치 독립된 어른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유독 연근 조림을 잘하셨다. 흙이 묻어있는 연근을 손질하면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일정한 두께로 썰어서 구멍 송송한 연근을 식초 물에 담그고, 간장과 마늘 한 스푼을 넣어 아삭한 식감이 베이도록 조렸다. 이 반찬을 만들 때면 온 집안에 고소하면서 새초롬한 냄새가 가득 찼다. 신맛이 나는 음식을 좋아하는 난 아버지께서 만드는 이 연근조림은 맨 처음 식초 물에 살짝 담가두는 게 특별한 아버지만의 킥이라 여겼다.
이렇게 성실한 아버지는 거짓말처럼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묵묵히 치료를 받으셨다. 케모테라피를 받으면 속이 메스껍고 식욕이 떨어진다. 매주 반복하는 치료행위는 분명 암세포를 죽이기 위함인데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건강한 세포들도 파괴된다. 옆에서 항시 어머니께서 동행하시며 다녔기에 함께 이겨내셨겠지만 아버지께서는 원체 그런 케릭터셨다. 아픈 자신을 더 건강한 가족들에게 무리해서 의지하지 않으셨고, 감정적으로도 자신이 왜 아픈지, 왜 하필 자신이 아파야 하는지 원망하면서 쏟을 수도 있으셨을 텐데 절대 그러지 않으셨다.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나중에 물어보니 앞으로 건강이 나아지는 일만 생각하셨다고 했다.
이런 아버지를 보면서 괜찮아지시겠거니, 점차 나아지시겠거니 희망 회로를 돌렸다. 어느새 3학년이 되어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자취방에 주방이 생겼다. 신기하게도 그 많은 이미지 중에 조리대 앞에 선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름지기 독립한 어른이라면 마트에 장을 보러 다니고 야채를 손질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이런 행위를 할 수 있어야지 암! 타지에서 혼자 살면서 연근조림은 못 만들어도 샐러드는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 야채들을 사 왔다. 다 먹지도 못하고 썩어갔다.
한국 집에서 전화가 오던 그날도 자취집에서 썩은 야채를 버리던 날 중 하루였다.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병에 걸리셔서 입원하셨다고 했다. 폐암 말기였다. 이미 손쓸 새 없이 위독해지신 할머니를 위해 아버지께서 하실 수 있는 최대한을 해주셨지만 역부족이었다. 비행기 티켓을 살 겨를도 없이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가족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채 추모하고 애도해 보려 했지만 혼자 동떨어진 나의 마음도 썩어들어갔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여파가 아버지의 마음에 크나큰 구멍을 남겼던 것일까? 완치를 1년 앞두고 있던 시점인 할머니 장례 이후, 아버지의 방광암은 폐암으로 전이되었다. 암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다. 아버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감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내 연약한 마음을 더 자주 탓하게 되었다.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미국이라는 기회의 땅에서 이루고 싶은 꿈들과 아직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연기처럼 흩어져갔다.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시는 듯한 아버지와는 달리, 나는 이쪽저쪽 선택하지 못한 채 이것저것 다 해보려는 우유부단한 사람이라 느꼈다.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잃어버린 것만을 좇는 부족한 아이 같았다. 예술가라면 마땅히 헝그리 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흑백사진을 무척 사랑하는 나이지만 이 마음을 뛰어넘을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사진작가의 꿈을 내려놓았다.
졸업 후, 가족들 곁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서로 온기를 나누며 마음과 몸과 정신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픔과 고통으로 물들거라고 예상했던 위기는 오히려 기회가 되어 운동을 모르시던 부모님의 인생에 새로운 활기와 등산이라는 취미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가족끼리 방방곡곡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단풍이 물든 설악산은 알록달록 참으로 아름다웠다. 우리나라에 산이 이렇게나 많구나. 계곡이 이렇게 에메랄드 빛으로 수색을 띠는구나. 걷고 또 걸었다. 헉헉대며 시뻘건 얼굴로 예약해둔 산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직접 저녁을 해 먹었다. 작은 냄비에 된장을 풀어서 작게 썰린 호박과 양파를 넣어 찌개를 끓였다. 후라이팬 같이 얇은 코펠에 삼겹살도 지글지글 구웠다. 다음날 하산하는 날엔 길이 너무나도 길어서 어머니는 입이 쭉 나오고 급기야 물을 마실 힘도 없으셔서 손수건에 물을 묻혀서 조금씩 빨아먹게 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뿌듯하고 재밌고 맛있는 추억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12년 만에 2번의 암이 드디어 완치되는 해가 도래했다. 이 과정 중에 오빠가 결혼해 우리 가족에게 새로운 가족 구성원들을 탄생시켰다. 인생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정의할 수가 없다. 죽음과 삶이 수도 없이 교차한다. 만약 인생이 하나의 서사가 있는 게임이라면, 주어지는 퀘스트를 완수하면 한층 높은 레벨로 갈 것이라 믿으며 달려간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길이 나온다. 또 다른 반전의 퀘스트를 헤쳐나가야만 한다. 삶을 아무리 평평하게 단언하려고 해봐도 막상 느끼게 되는 것은 오만가지 빛깔의 스펙트럼이다. 회색으로 침잠하는 그림자 같은 시기가 있다면, 마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억 구슬처럼 다른 한쪽으로 이 기억을 돌려서 쓸어보면 기쁨과 환희의 노오란 빛의 기억이 감돌기도 한다.
아버지의 투병 시기는 내게 내면적으로 외로움, 해결하려고 애써도 정답이 없는 우유부단함, 그리고 수치심으로 말미암은 후회가 동반되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이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야기나, 병마와 싸운 이야기를 들으면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부끄러울만도 한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열하게 되었다. 사실 아직 정확히 오열하는 나만의 이유가 무엇인지 깊숙이까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알고 싶은 마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께서 아프신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눈물 짓게 하는 치트키인것은 분명하지만 내겐 멘탈이 연약했던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홀로서기를 잘 해내야 했다는 갑작스러운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유학하는 내내 이 감정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은 채 무의식 속에 내버려두었다. 아버지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어머니께서 고군분투하도록 둘 수밖에 없는 상황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자식들은 떨어져 있는 만큼 자신의 선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뒤엉켰다.
한국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다시 같이 산 지 꼬박 10년이 되는 지금은 안다. 이 긴긴 시간 동안 각자의 위치에서 회색빛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저마다의 킥을 가진 연근조림 레시피처럼 사뭇 건강하고 독립적으로 변화했다고. 지나고 보니 이때까지 내 길을 찾으려 애쓰는 원동력은, 오열을 일으키는 아버지의 투병 과정 그 과정 속 무의식에서 발아했던 홀로서기 열망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