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글쓰기 모임을 마친다
연초부터 매주 모여 글을 쓰고 낭독하고, 적극적으로 서로를 경청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바로 ‘다정한 우주’로 이설아 작가님께서 만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글쓰고 나누며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치유의 영향을 준 나의 새로운 울타리다. 비록 온라인으로만 얼굴을 맞대고 모였지만 글을 나눌 때만큼은 온몸으로 감동이 전달된다.
다정한 우주에게 보여줄 글을 쓸 때에는 스스로를 감추게 되거나 부풀려서 보이게 되지 않는다. 솔직하게 드러내도 무척 안전하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어떻게 하면 더 담백하게 보여주지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시간이 다소 걸려 글을 쓰더라도 기다려준다. 낭독할 때에는 단단한 내 목소리로 우렁우렁하게, 한 글자 한글자 또박 또박 이야기한다. 각자의 속도대로 음정대로 글을 길어낸다. 이러는 상대의 이야기엔 귀기울인다. 그럴 때마다 영혼이 소통한다는 감각을 몸소 느낄 수 있다.
연말부터 가장 최근까지도 자꾸 안타까운 일들이 연이어 생겨나니 마음에 생채기를 그어졌었다. 연이은 비극으로 인하여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우리의 일상은 계속 되었다. 그러면서 다정한 우주에서 첫번째 글쓰기 과제를 시작했다.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 중 어떤 한 사건을 ‘나는 기억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과제였다. 어찌보면 과거의 나와 화해할 수도 있는, 혹은 못다 정리한 일들을 회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글쓰기 걸음마를 뗐다.
서로 나이대가 다 다른 30대에서 60대에 걸친 선생님들이 (서로를 선생님이라 칭한다) 한데 모여 참여했기에 인생의 숲을 일궈내신 분들도 계시고 일과 가정에서 나다움을 찾는 언니도 계시고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무척 행운이었다. 어쩔때는 마치 나의 엄마, 아빠, 선배, 언니같이 가까운 이들과 비슷하게 느껴져 감정이입하며 글에 접속하기도 했다.
서로 나이는 달랐을지 몰라도, 함께 나누는 글에는 나이가 없었다.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면 더 읽고 싶어 갈증이 났다. 이 자리를 빌어, 계속해서 써달라고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보낸다. 쓰는 사람 대 쓰는 사람으로 소통하며 서로의 감상을 나누었다. 팬심 가득한 ‘정말 좋아요’와 같은 러브레터, 별풍선 같은 칭찬은 글을 쓸 때 쑥쑥 자라나는 자양분이 된다.
과거의 작은 조각을 풀어내어 지금의 나를 보듬는 글을 썼다. 듣는 이가 있다 여기니 솔직한 감정 또한 어루만질 수 있었다. 서로의 시간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어 흔적을 남겼다. 다른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며, 내 글을 선보이며, 앞으로도 계속 글쓰고 싶다는 감각을 알아차렸다. 다정한 우주 선생님들에게 쓰는 일종의 러브레터 같은 글이 되었다. 글에 통통 튀는 생명력이 생겨났고 놓치지 않고 발견해주셨다. 평소 친구들과는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들도 좀 더 진솔하게 맥을 짚어서 전달할 수 있었다.
나의 짧은 경험담을 보듬어주고, 격려해주고, 등 두려주고 더 잘 해보라고 응원해준 다정한 우주. 좋아하는 이들과 다정한 동네를 이루며 살고 싶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들과 우주를 이루어 각자의 세계가 촘촘히 별처럼 수 놓아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분명 글을 나누는 모임이었는데 ‘내가 나로써 존재해도 퍽 괜찮구나’라는 어떤 근원적인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어 신기했다.
마지막 합평 시간에 ‘글쓰기, 너 뭐니?’라는 놀이같은 화두를 던져주신 선생님의 주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글쓰기, 나에게는 내 안에 관심을 가져달라 투정부리는 어린아이와 주고 받는 러브레터 같다.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 않는 일들에 대해 ‘나는 이런 게 참 좋았는데. 그거를 이렇게 써보면 어때? 지금은 이런게 고민이구나. 어떻게 하고 싶은지 글로 풀어내봐’ 라고 말을 걸어본다.
과거의 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과거는 매번 바뀔수도 있지 않나? 마치 영화 <러브레터>에서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애틋하게 여기게 되는 주인공처럼, 글쓰기는 지금의 내가 인식하는 과거를 현재로 관통하여 감각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매개체이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과거로부터 자유롭도록, 그렇게 현재를 또 힘내서 살아가기를, 계속해서 바라며 글을 쓴다.
길고 긴 인생에서 6주라는 과정은 짧았다. 또다시 다정한 우주에 속해 그 온기에 기대어 글쓰고 싶어질 것이 분명하다. 현재 내 삶과 평행선상을 달리는 세계의 소식이 팍팍해지고 간혹 잔인해질 때, 다정한 우주를 떠올려본다. ‘글’을 통해 자신을 마주하고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풀어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지내보려고 한다. 삶의 긴 대서사시도, 삶의 칼날 같은 단면도 살아낼 수 있다. 왠지 쓰기 어려운 일들도 다정한 우주를 상상하 배짱있게 담담하게 써내려질 것만 같다.
<잘 지내냐고, 난 잘 지낸다고> 더이상 글을 쓸 때에 두렵고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