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실험 일지 가설 세우기 - 서로 별개의 두 역할이 일으키는 시너지
지금까지는 일 하는 나와 창작하는 나, 두 역할을 '분리'해왔고, 그걸 서로 갈라서 정체성의 색깔을 균형있게 가져가는 데 주력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방향을 달리하기로 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게 마치 가면을 바꾸듯이 한 얼굴이었다가 다른 얼굴로 갈아끼워지는 게 아니더라구요. 나라는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담아내는 호수 같아서 하나의 파동이 일면 다른 파동과 자연스레 겹쳐요. 그래서 일 실험 주제는 두 역할과 경험 사이에서 중첩되는 장면을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중첩”의 의미를 찾아보니 '거듭 겹치거나 포개어짐'이라 적혀있고 아래에 "양자중첩"이라는 연관 어구가 뜨더라고요. 양자중첩은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으로 “둘 이상의 다른 별개 상태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해요. 제가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창작하는 행위들은 별개이지만 합쳐진 저의 모습 자체가 “중첩”이더라고요. 정말 엉뚱하게도, 양자 중첩이라는 과학의 개념을 찾아보니까 내 길을 더 새롭게 상상하게 됐어요. 게다가 지금처럼 이렇게 일하는 나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얻은 에너지로 새로운 창작을 하는 두 세계에서 중첩되며 존재하는게 나만의 모습이라는 확신도 얻었고요.
일 실험 주제를 정하고 나면, 그 주제에 대해 꾸준히 머릿속에 떠올려봐요. 그렇지만 강박을 갖지 않고, 매일 daily note에 그날 했던 일 3가지 내외로 적고,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주욱 적어요. 매일 차곡 차곡 쌓다보면, 새로운 관점이 보여요.
최근에 발견한 건 '현장'과 관련된 중첩된 일의 모습이었어요. 일터에서 행사를 하게 되면 현장에서 고객사를 도와 크리에이터 툴이라던가, 새로운 마케팅 도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고객들을 온보딩 시키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요, 이렇게 '현장'에서 '참여자'들과 함께 어우려져서 '목표'를 달성하도록 돕고 이끄는 역할에서 의미를 느낀다는 걸 포착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서 작년 6월 자아성장 플랫폼 밑미에서 진행한 <오프더레코드> 전시 연계 프로그램에 진메이커를 맡아 참여했을 때, 참여자들이 진zine을 직접 보고, 만들고, 몰입하는 과정을 도왔던 게 아직까지도 종종 떠오르는 장면이더라구요.
진짜 신기하게도, 요즘 일이 무척 재미있어요. 분석하는 일에서 계속해서 재미를 느끼고 있고, 평소에 어려워 하던 창작자 계정 홍보도 야금야금하고 있어요. 소셜 미디어 회사를 다니면서 좋은 점은, 비즈니스 관점으로 보게 된다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보다가, 브랜드로서 소셜을 할 때 상대방이 얻어가는 베네핏이라던지, 메시지를 명확히 인지시켜야 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창작 브랜드를 더 진정성 있고 매력적이게 보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고민을 하게 돼요.
이렇게 매일 매일 두 세계가 교차되고 중첩되는 시간을 보냅니다.
해리님께서 말해주시기를 일 '실험'에서 빠져서는 안되는 것 중 하나가 '가설'이라고 하셨어요. 어떤 가설을 세우고 그 과정을 지내보느냐에 따라 얻어가는 학습도 다르겠죠? 중첩되는 장면을 발견하고, '서로 별개의 두 역할이 중첩되면 시너지를 일으킨다'는 것이 현재 일 실험 가설입니다.
데이터 분석과 전략기획을 돕는 운영업무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발산하기보다 이미 서로 연관성이 있는 데이터를 검증하고 연결해서 재편집된 관점에서 고객사에게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인사이트를 뽑아내는데 창작과 교차하면서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두근거리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해요.
본래 알고 있던 스스로의 모습과 180도 다른 성격의 일을 하고 있는 셈인데, 이게 너무 재밌는거 있죠. 숫자의 세계도 몰입하면 연결 고리를 생각하느라 꼬리뼈가 아프고 종아리는 퉁퉁 부어도 계속해서 골몰하게 돼요. 새로운 세계를 알아가는, 몰입하는 그 순간에 희열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어요. 잘 몰라서 안개같이 느껴질 때가 태반이지만, 그 안개를 계속 뚜벅 뚜벅 걸어가며 어렴풋이 알아가요.
김해리 리추얼 메이커의 <나다운 일을 실험하는, 일 기록> 3기 리추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