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구석 난포 Apr 09. 2024

배란 - 책을 쓸 결심

임산부, 책 쓸 마음먹은 것에 대한 변명

간단하게 여성의 난소를 집이라고 생각해 보자. 난소 저택 안에서 미성숙한 난자들이 바글거리며 자기 차례를 기다린다. 그 수많은 예비 후보들 중 잘 나가는 녀석 하나가 '이 달의 배란권'을 따낸다. 이제 난자는 저택 바깥으로 대망의 첫 외출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배란, 즉 성숙한 난자가 한 달에 한 개씩 난소에서 배출되는 현상이다. (생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물론 모든 배란이 임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수정이 되지 않은 난자는 그냥 없어진다. 그래도 여전히 배란은 중요하다. 일단 난자가 외출을 해야 짝도 만나고 데이트도 해 볼 수 있다. 배란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모든 가능성의 시작이다. 어쩌면 책을 쓸 결심을 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작가가 업인 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책 한 권을 쓰려면 딱 한 가지 동기는 부족할 것 같다. 여러 가지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동해야 이 힘든 길로 자신을 몰아붙일 수 있을 테니.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일단 산부인과 의사로서 임신과 출산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속속들이 체화하고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일기처럼 틈틈이 써 둔 글이 꽤 많이 모여서 그냥 컴퓨터에 쌓아만 두기에 아깝기도 했다. 책으로 만들면, 혹시 나중에 내 아기가 자라서 읽으며 기뻐하지 않을까? 사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이 제법 고독한 일인데, 다른 산모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에게 개인적 위안이 된다는 점도 있었다. (그러니 내 이야기도 남들에게 위안이 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더 솔직히 말하려면, 내 원고를 들춰봐 준 친구와의 대화를 소개해야 한다.


"아니, 이게 대체 이 많은 글을 언제부터 쓴 거야? 언니 임신했을부터?"

"내가 워낙 게으르잖아. 엄청 오래 걸렸어. 정확히는 임신 전부터니까... 딱 4년 된 것 같네."

"우와! 어떻게 책을 쓸 생각을 했어? 애도 키우면서 고생했겠네. 이제 이걸로 셀럽이라도 되는 건가?"

"어휴, 무슨 소리야. 글쎄. 그냥... "

"...그냥???"

나는 겸연쩍어서 딴청을 피웠다.

"글쎄... 멋지잖아."


말해 뭐 해, 멋지잖아!


책이라는 것이 좀처럼 팔리지도, 대중에게 와닿지도 않는 시절이다. 진짜로 '셀럽'이 되고 싶다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몰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한 권의 서적에겐 특유의 고전미가 있지 않은가. 한 인간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태어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 하나의 독립된 물체로서 서가에 꽂힐 수 있는 적당히 무겁고 또 적당히 가벼운 대상. 표지, 내지, 목차, 머리말, 본문 등의 전통적인 형식미와 그 틀 안에서 활자만으로도 무한한 변주가 가능한 자유로움의 공존. 책은 멋지고, 그 책을 탄생시키는 일은 더욱 멋지다.


나의 '책 낳기' 여정에서 배란에 해당되는 것은 이것이었던 것 같다. 잘 쓴 책과 그런 책 쓴 사람, 참 멋지다는 감각. 다들 쇼츠나 릴스로 대박 나는 시대에 꽤 고루하고 촌스럽다. 패스트푸드 시대에 보기 드문 슬로 푸드 취향이라고나 할까. 내가 너무 낭만적이고 순진한 사람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동경의 감각이야말로 책을 써서 벌릴 돈이나(인세로 돈을 번다는 생각야말로 사실 아주 순진한 기대이다.) 유명세에 집착하는 것보다 쓸모 있는 동력이 된다. 세상에는 돈을 벌거나 유명해질 더 쉬운 다른 방법이 아주 많다. 하지만 책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책을 위한 열정이 샘처럼 피어난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지난주에 생긴 것이 아니라면, 몇 년 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써야 하는 사람이다. '의미의 우주'에 한 발을 들였고, 그 우주에 자신의 의미를 보태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 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어쨌든 부러워하는 것 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배란도 특별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난자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다음 글에서 아이디어와 출간 기획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