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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Apr 17. 2024

자라나는 난자 - 아이디어와 기획

책으로 쓸 만한 구조와 가치가 있는 이야기

여자 태아가 가진 원시 세포(훗날 난자가 될 수 있는 세포)의 개수는 무려... 600만 개가 넘는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이건만, 먼 훗날을 도모하는 준비가 이토록 호들갑스럽다. 아기가 태어날 때쯤 이 꼬꼬마 난자 후보들이 상당수 사라지며 대강 백만 개가 된다. 예비 난자들은 이 단계에서 잠시 멈추어 오랫동안 숨을 고른다. 여자 아기가 여자 어린이가 되고, 성호르몬 신호를 받는 사춘기를 맞이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제 난자가 될 세포의 숫자는 불과 수십만 개로 줄어들었다. 초경을 시작하고 생리 주기를 만나도 정작 기회를 갖는 것은 아주 일부분이다. 몇몇만 선택적으로 성숙하고, 최종적으로 배란까지 되는 것은 한 여성의 일생 전체를 통틀어도 수백 개에 불과하다. 생명체는 생식이라는 일생일대의 도전을 걸고 단계별로 변화를 거듭한다. 수백만 개에 달하는 원시 세포가 고작 수백 개의 배란 난자로 추려지기까지, 거르고 또 거르는 과정을 거친다.


모든 생각이 글이 되지는 않고, 모든 글이 책이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단 아이디어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되고, 글이 있어야 책을 엮을 수 있는 것도 맞다. 한 권의 책을 일필휘지에 완성시키는 작가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다듬고 다듬는, 추리고 추리는 과정이 매우 길고 지난했다. 수 년동안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기획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고 꼭지글을 쓰고 자료를 모았다.


처음 가졌던 아이디어는 '출산에서 두드러지는 인간의 내재적 취약함'이었다. 나는 당시 막 전문의가 되고 분만병원에서 일하게 된 새내기 의사였다. 정신없던 전공의 시절이 지나자 산부인과학의 의미와 맥락이 비로소 눈에 조금씩 들어왔다. 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도 내가 하는 일이 되게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모성사망(임신/출산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동시에 산부인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세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예전엔 모성 사망이 아주 흔했다. 2)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3) 현대 의학 덕분이다, 만세! 엄청 단순한 이야기지만, 나에게는 이 주제가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다. 가열차게 자료를 조사하고, 목차도 구상해 보고, 어설프나마 몇 꼭지의 글을 썼다.


나는 용감하게 그 기획을 출판 관련 종사자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구해보았다. 한 기성 작가가 내가 내민 종이를 훑어보고 미지근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딱 의사가 쓸 법한 글이네요."

... 점잖은 욕이었다. 일반 독자에게는 즈언혀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의사가 일방적으로 의사의 입장을 토로하고 스스로 공치사를 한 것에 불과하다. 필수의료/바이탈이 요즘에야 뉴스에 많이 오르내리기는 한다만, 그것 자체만으로 대중에게 재미있는 소재는 아니다. (애초에 많은 대중적 관심을 받는 분야라면... 지금처럼 망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아차차, 이 길은 아닌가 보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아무래도 글 쓰는 것을 배워 본 적이 없는 탓인 것 같다. 나는 과학 저술가 교육과정을 수강하기로 했고, 멘토 이은희 작가님도 만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나는 '뭐가 뭔지 전혀 감을 못 잡은 초보'들이 으레 하는 행동을 충실히 반복했다. 과제와 상관없이 글을 많이 쓰고, 많이 보여드리고, 많이 첨삭도 부탁했다. (감사합니다) 피드백은 예상 밖이었다. 꼭 의학적으로 거창한 주제나 심오한 깊이를 다루지 않을지라도, 나만의 경험과 현장감이 살아있는 글이 가장 흡입력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긴 일반적인 의학, 일반적인 과학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학문적 대가도 아니고 유명 병원 교수도 아니다. 그냥 흔한 동네 의사가 늘어놓는 썰을 누가 그리 관심을 가져줄까? 결국 '나'를 글에 풀어놓아야만 했다. 나 자신이 내가 가진 가장 매력적인 소재였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당시 임산부였던, 아기를 낳을 예비 엄마였던 '나'를.


그래서 나의 임신 경험담을 넣는 것으로 다시 기획을 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끝이 아니었다. 사실은 출판사랑 계약을 하고 나서도 기획과 목차를 전부 바꾸었다. 글도 새롭게 썼다. 기존에 조사해 둔 자료와 써 둔 쪽글은 든든한 곳간이기는 했다. 하지만 <기획>의 차원에서 책의 콘셉트는 여러 번 모습을 바꾸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기획에 가장 많은 공과 오랜 시간을 들인 것은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내가 써 둔 글은 글자 수로만 치면 진작에 단행본 몇 권의 분량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일관된 의미를 갖는 기획을 구상하고, 그 기획에 부응하는 구조를 짜내는 작업을 위해선 많은 분량의 글을 철저히 선별하고 다듬어야만 했다. 마치 600만 개의 원시 세포들이 수백 개의 난자로 좁혀지는 지난한 과정처럼. 


한 권의 책이란 단순히 여러 글의 합계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맥락을 관통하는 기획을 세우는 것이 책 쓰기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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