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구석 난포 Apr 23. 2024

수정 - 나와 맞는 출판사 만나기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난자도 정자를 고른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 수정이란 어떤 이미지일까? 많은 사람들이 고고한 난자를 향해 맹렬히 헤엄치는 수억 마리의 정자를 떠올릴 것 같다. 정자는 경쟁하고 성취하지만, 난자는 그저 머무르고 기다린다는 것은 낡은 편견이라는 것이 과학 세계에서 나날이 드러나고 있다. 난자는 정자를 유인하는 신호 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니 난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정자가 난자를 '향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난자 덕택이다. [1]

방향 지시뿐만이 아니다. 난자의 신호는 정자에게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정자에게는 유리하게, 어떤 정자에게는 불리한 환경을 난자의 신호 물질이 조장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2] 난자 나름대로 좋아하는 정자, 혹은 배우자감을 취사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수정이란 결코 일방적인 결합이 아니다. 서로간의 수많은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과정이다.


과학 저술가 양성 교육과정은 여러 모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같은 교육생 중 상당수는 이미 양질의 글을 많이 써보신 분들이 있었기에 동료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았다. 심지어 이미 성공적으로 과학 작가 생활을 하고 계신 분들도 있었다. 나는 교육 과정이 아니었더라면 '옥고'나 '합평'같은 글쓰기 세계의 단어를 죽을 때까지 들어 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설마 브런치 이웃님들은 다들 이 정도 말은 알고 계시는 것인지...?) 내가 또 처음 들어 본 단어는 '투고'였다. 원고와 기획서를 출판사에 보내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어야 한단다. 나도 정성껏 원고, 기획서, 나의 프로필을 출판사에 보내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새로운 이메일 알림이 올 때마다 눈이 반짝였다. 다행히도 여러 군데에서 긍정적 연락이 왔다. 타율(?)로 치자면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초보 작가로서 믿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얼마나 믿을 수 없었냐면, 사기를 당하는 줄 알았다.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십 대 시절 과학책에 몰두하고 글 쓰는 사람을 동경했는데, 나도 처음으로 내 글로 관심과 인정을 받는 것 같았다. 아기를 잠시 맡겨두고 바쁘게 채비해서 나가는 출판사 미팅도 발걸음이 가벼웠다. 잘 보여야 할 것 같아서 애 낳고 간만에 화장도 해보았다. (편집자님, 대표님들이 보시기에도 티가 많이 났을 것이다. 하하.) 나는 애초에 내 주제와 결이 맞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는 과학책 출판사에만 투고했다. 모두 좋은 곳이었고 감사한 기회를 제안해 주셨기에, 한동안은 그저 들떠 있었다. 그러던 중 깨달았다. 작가와 출판사가 대망의 계약까지 이어지는 것은 기계적이고 일방적인 투고-승낙이 아니다. 나도 출판사 중에서 궁합(?)이 잘 맞는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각각 고유의 개성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의 편집자들로부터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내 원고를 두고 이런저런 방향성을 제안받게 되었다. 개중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메시지를 잡으면 성공할 거라는 의견도 있었다. 혹은  나에게 '스타' 자질이 있는지 궁금해하던 출판사도 있었다. 그런 제안들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나는 출판사가 '스타 의사'로 마케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아니다) 나는 대중의 눈길을 끌기 위해 출산에 대해 부정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아니다)


최근의 출판 동향에서 아무래도 출산이나 육아는 인기로 따지면 꼴찌일 것이다. 요즘 출판 업계에 가장 잘 나가는 주제 중 하나가 혼자 살기, 비혼으로 살기, 비출산(딩크)으로 살기 등등이다. 반면 나는 과학책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출산과 육아를 긍정하는 메시지를 기획했다. 만약 내가 생각한 대로 내 책을 쓴다면, 이 책의 독자층은 너무나도 좁을 것이다. 출판사는 나에게 자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엄연히 이익을 내야 하는 기업이다. 고작 나 같은 풋내기 아마추어가 시장의 거대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출판사나 편집자가 특정한 방향을 원한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이어가던 차에, 에이도스의 박래선 대표님과도 미팅을 하게 되었다. 내가 가장 많이 참고한 책들이 에이도스의 진화, 모성 등을 주제로 한 책이기에 최우선 출판사였다. 책들의 완성도가 높고 생태, 과학 분야에 일관된 애정이 드러난 출판사라서 기대가 컸다. 카페에서 약속을 잡고 미리 도착해 있었다. 주말의 시끌벅적한 카페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쉽게 서로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인파 사이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키가 큰 중년 남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분홍 어린이 배낭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도 들어왔다.


'하하... 별 특이한 사람이 있네. 저 분만 아니면 좋겠다.'


곧바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는데, 이게 웬 걸. 전화와 메일로 연락하던 출판사 대표님이 바로 그분이었다. (나는 잠시나마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손바닥만한 분홍 가방을 든 거구의 중년 사내.


에이도스 출판사의 1인 운영인이자 편집자인 박래선 대표님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아이 배낭을 멋쩍어했다.

"그... 이게, 제가 이따가 저희 아이 데리러 가야 해서요."


두 아이를 잘 돌보기 위해 대형 출판사에서 독립했다는 짧은 소개가 이어졌다. 나는 분이 내 책과 잘 맞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여러 번의 행운이 겹친 덕에 나도 궁합이 맞는 출판사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유인 신호를 분비하는 난자처럼 나의 원고를 적극적으로 투고하고 프로필을 정리하고 브런치를 통한 활동을 했다. 나는 정자를 골라내는 난자처럼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신중히 출판사 선택을 했다. 내가 출판사와 계약을 하자, 일종의 '수정'이 이루어진 셈이다. 복잡한 서로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출처>

[1] 최영은. (2019). 탄생의 과학. 웅진지식하우스.

[2] Fitzpatrick, J. L., Willis, C., Devigili, A., Young, A., Carroll, M., Hunter, H. R., & Brison, D. R. (2020). Chemical signals from eggs facilitate cryptic female choice in humans. Proceedings. Biological sciences, 287(1928), 20200805.


이전 02화 자라나는 난자 - 아이디어와 기획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