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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Apr 30. 2024

착상 - 독자에게 착! 붙는 글이 되도록

읽어줄 사람을 위한 글을 써보자

정자와 난자가 천신만고 끝에 만나서 수정을 이룬다고 끝이 아니다. 수정란이 자궁벽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착상이라고 부른다. 새가 낳은 알은 일단 수정란이 되면 자체적으로 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 같은 태생동물은 다르다. 엄마 몸에 빨대를 야무지게 꽂아두어야 아기가 자라난다. 착상이 잘 되면, 수정란은 자궁벽을 파고들면서 태반을 형성한다. 비로소 단단히 똬리를 틀게 된다.

이 과정은 말 그대로 파고드는(invasion)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수정란은 엄마 쪽에서 절반, 아빠 쪽에서 절반을 공여한 유전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자궁 입장에서 타인이고, 인체는 이러한 '이물질'을 공격하고 걸러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래서야 수정란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자궁과 모체는 참 고맙게도 아기라는 타자에게 너그러움을 베푼다. 잠시 경계 태세를 완화하고 자신의 면역을 양보한다. 양분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산소를 가져가게 한다. 노폐물을 대신 처리해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이 너그러움의 산물이다.


나는 종종 일기를 쓴다. 요즘은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혹시 이런 기록도 책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들은 책은커녕, 그 누구에게도 공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어느 날에는 '세상에! 우리 아기가 혼자서 영어 노래를 불렀어! 혹시... 천재?!?!' 따위의 감상을 끄적여 놓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행여나 누가 읽는다면 주책맞은 극성맘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세상에 대해 너절한 불평을 늘어놓거나, 싫어하는 사람 헐뜯는 내용도 마찬가지다. 까딱하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을뿐더러, 내 인간됨의 저열함만 탄로 날 뿐이다. 그러니 나의 일기는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는 것이 옳다. 


나는 내 일기가 읽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제발) 읽어주십사 브런치에 올리거나, (굳이) 책으로 출판한 다른 글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기에는 가상의 독자가 없다는 것이다. 일기를 구성하는 문장은 나의 주관 안에서 즉각적으로 생성되고 다른 해석의 여지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일기는 독자를 배려할 필요가 없어서 나는 의학 용어나 병원 은어, 때로는 욕설을 아무렇게나 쓴다. 일기를 쓸 때에 나는 글의 문맥과 구조를 생각하지 않는다. 일기의 유일한 독자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의 내적 세계에서 이미 마련된 관계를 글을 통해 재창조할 필요가 없다. 한두 문장만 끄적여 두어도 훗날 일기를 읽은 나는 척! 하고 알아듣고, 곧바로 감정과 생각을 호출해 낼 수 있다. 아, 일기야말로 쓰기 참 편하다. 지금 이 글만 해도 꽤 고민을 하면서 써야 하는데...


하지만 책이 되려는 글은 절대로 이따위여선 안 된다. 독자가 있어야만 하고, 독자를 가정하고 써야 한다. 저술 수업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가능한 구체적인 독자를 상상하고 글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들 한다. 얼핏 생각하기로는 독자층이 넓어야 책도 많이 읽히고 성공할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성별, 나이, 성향처럼 여러 특징을 생생하게 그려 넣은 독자를 가정하고 글을 풀어놓아야 책이 더 생명력을 얻고, 더 잘 '파고든다'고들 한다. 비로소 기획을 마친 출산의 배신 바로 그 생생한 독자를  찾아 나섰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여성을 가정했다. 한국의 특성상 도시 거주자일 확률이 높고, 고도로 문명화된 생활 방식에 익숙할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임신 계획이 있거나, 첫 임신을 경험중일 것이다. 혹은 최근에 아기를 낳았을 수도 있다. 나와 동질성이 높은 그룹이고, 내가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대화하는 연령대의 사람들이다. 그래,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재생산(임신-출산-육아) 전반에 걸친 정보의 한계, 통제의 상실, 현실-이상 괴리라는 요소가 출산에 있어서 허들로 작용한다는 메시지를 설정했다. 이제부터 이 주제를 내가 설정해 둔 가상의 독자를 위해 설득력 있게 풀어내면 된다. 그렇다면 읽는 이는 어떤 내용에 눈이 가고, 마음이 움직일까? 아무래도 '산부인과 의사이며 동시에 산모인 나 자신'의 이야기를 숨겨둘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임신하며 마주한 동일한 어려움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태도를 보였을지 궁금할 것이다. 


그래서 경험담은 강력해진다. 예를 들어 보자. 걱정이 많은 초산모와 상담을 할 때 '의학적으로 이런저런 상황이며, 향후 어떠한 경과로 진행될 확률이 얼만큼이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류의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설명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휴, 너무 힘들죠? 저도 임신했을 때 그랬어요~ 그런데 괜찮아지더라고요.'라며 싱긋 웃어주면 산모들은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고, 나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물론 이것이 의료에서 결정적인 부분은 아니겠으나, 상대와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은 때때로 중요한 열쇠가 된다. 


사실 처음에는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나는 점잖게 뒤로 빠져서 훈수만 두고, 때때로 추임새나 넣는 정도가 적당해 보였다. 내 경험담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이었고, 약간은 불운한 것이기도 했다. 임신 중에 초음파 검사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고, 가장 큰 걱정거리는 태아의 심장 문제였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거니와, 더없이 속상했던 기억이 생생한 일화이다. (다행히 아기는 지금은 큰 탈없이 자라고 있다.) 굳이 남들에게 밝히고 싶지 않았다. 벌거벗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원고가 독자에게 파고들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가감 없이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너도 그렇니? 역시 힘들지? 나도 그래. 그런데 말이야...'라는 연결고리가 필요했다. 그래야 초보 작가이자 아무런 학술적 권위도 없는 내가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의 일기도 나 개인에게 의미는 있겠으나, 그것들은 착상되지 않은 상태로 그저 부유하기만 해도 내게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 하지만 나의 책은 타인의 정신에 접착하기 위해, 전적으로 가상의 독자를 향해 마련되었다. 나는 그들이 지나친 불안, 지나친 이상, 지나친 통제욕을 조금씩만 덜어내고 보다 만족스러운 출산을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써 내려갔다. 만약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독자들이 나에게 '너그러움'을 베풀어준 덕이다. 이 즐길거리 넘쳐나는 세상에, 고작 무명작가의 글을 읽기 위해 시간을 쓰고 머리를 쓰고 심지어 기꺼이 책을 구매하는 돈까지 쓴 자들이 책이 뿌리를 내릴 토양이 되어 주었다. 양보를 무엇보다 감사하게 생각하기에, '착상'을 위한 나름의 노력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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