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구석 난포 May 08. 2024

발생 -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일까?

중심축을 갖춘 목차 만들기

사람 몸은 아무렇게나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가 인체의 생김에 익숙하다 보니 무심해지기 쉽지만, 엄연히 일정한 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일단 머리쪽-꼬리쪽이 있다. (사람은 꼬리가 없다. 다만 해부학적으로 머리와 반대쪽을 꼬리쪽-caudal-이라고 부른다.) 이 축이 제대로 잡혀야 순서대로 머리-체간-꼬리가 정렬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배쪽-등쪽을 맞춰서 신체를 형성해야 한다. 가슴이 등짝에 달려도 안 될 일이다. 마지막으로 오른쪽-왼쪽도 구별해야 한다. 심장은 약간 왼쪽에 있어야 하고, 간은 오른쪽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인체의 방향성과 중심축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수정이 된 이후부터 세포들은 나름의 정렬을 위해 자기 자리를 찾아서 분주히 움직인다. 중요한 비법은 유전자이다. 이를테면 hox 유전자는 머리, 목, 가슴, 허리, 골반 그리고 다리라는 순서대로 올바른 구조물이 형성되도록 지정한다. 그래서 hox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해야 신체가 제대로 정렬을 갖출 수 있다. 태아의 축이 배열되는 시기는 임신의 지극히 초기 시점부터이다. 당연한 일이다! 세포만 마구 늘인 다음에 다시 구조를 정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의 형상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어야 하기에 축을 먼저 잡고, 거기에 살을 붙인다.


책 쓰기 방법론을 다루는 책을 읽어보면, 하나같이 목차를 잘 짜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조적인 글을 쓰려면 목차가 척추처럼 튼튼하게 바로 서야 한다고들 한다. 개인적으로, 좋은 목차를 만드는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목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법칙에 가깝다. 큰 흐름을 보여주는 내비게이션이 존재해야 독자도, 그리고 쓰는 입장에서도 글이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다. 형식이 완전히 자유로운 문학이라면 경우가 다르겠지만, 지식을 구조화하는 것이 교양서의 정체성임을 생각해 보면 목차의 중요성은 자명해진다.


출산에 대한 책을 쓰고 있던 나는 어떤 '축'을 세워야 할까? 일단 임신-출산-육아는 언제나 시간 순서대로 일어나는 일이다. 임신에 관련된 의학 정보서도 시간 순서를 중시하고, 출산 수필 류의 책도 대체로 경험 서사를 따른다. 나도 시간 서사를 따라가는 것이 맞을까? 하지만 내 책의 주제에는 그런 구성이 적당하지 않아 보였다. 재생산의 고됨에는 각 단계를 관통하는 핵심 요인이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나는 임신 기간 내내 고기를 전혀 먹지 못했다. 평소에 그렇게나 고기를 좋아하는데도! 심지어 누군가가 '삼겹살'이라는 단어만 말해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임신 중이니까 아무래도 골고루 먹어야 좋을 것만 같은데, 전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 의지와 완전히 상관없이 일이 흘러가버린다는 그 느낌, 그때와 동일한 느낌을 아기를 키우는 지금도 자주 느낀다. 왜? 애는 훨씬 더 간단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나의 의지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 순서대로만 엮으면 내가 체감한 공통점을 쉽게 연결하지 못한다.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엄마는 네가 커튼 빨래를 침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누군가가 임신과 출산이 어째서 힘드냐고 하면 각양각색의 답변이 나올 것이다.

"아니, 의사 양반. 그걸 굳이 글로 써야 알아? 애 낳는 게 죽을 만큼 아픈 걸 누가 몰라?"

"산부인과 다니는 게 얼마나 싫은지 알아요? 아휴, 끔찍해. 말을 말어~"

"흥, 애 낳는다고 끝도 아니야. 좋은 엄마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울분(?)으로 대표되는 이 모든 심상이 펄펄 끓는 스튜처럼 모두 한 솥에 뒤섞여 있으면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없다. 나는 아기를 낳은 나의 경험과 산부인과 의사로서의 지식, 조사한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솥을 뒤져가며 스튜 재료들을 하나하나 건져서 다시 분류했다. 음, 흐물흐물한 것은 양파. 갈색 덩어리는 고기. 허여멀건 한 것은 떡점인가? 아니지, 감자인가...? 이 과정을 거쳐서 정보의 한계, 통제의 상실, 이상과의 괴리라는 3가지 주제를 설정했다. 내 나름의 머리, 몸통, 다리를 찾아냈다.


이제 큰 덩어리를 구체적인 키워드로 다시 대표해서 책의 각 장을 만들기로 했다. 출산을 상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고통의 이미지, 산통과 신체에 대한 것으로 말문을 트는 것이 적당해 보였다. 몸의 변화,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통제력 상실을 실감하는 첫 번째 단추이다. 다음은 되도록 가시적 순서대로 배열해 보았다. 상황을 정확히 예측하거나 뜻대로 조종하기 어렵다는 재생산의 불확실성이 뒤를 이었다.


그래서 책의 전반부는 출산 특유의 생물학적 속성이 산모에게 어려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문화가 발전하고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 출산의 각종 난관을 극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에는 현대의학과 모성신화에 대해서 기술하기로 했다. 우리의 의료 행태와,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엄연히 변화할 수 있다. 영영 지금과 같으리라는 법이 없고, 얼마든지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나는 출산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인 입장이다. 그렇기에 이런 구성을 통해서 책을 다 읽은 독자가 희망적인 느낌을 갖길 바랐다.


앞서 잠시 소개한 '순서를 지정하는 유전자'는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초파리에서 최초로 발견되었고, 동물과 식물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물군에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초파리와 사람을 만들어내는 설계도의 내용은 다를지언정, 두 생물 모두 기초 설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구조를 갖춘 생물은 언제나 축을 중심으로 발생한다. 나도 목차와 구성을 결정하고 나니, 비로소 원고의 척추를 세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부터 한 꼭지씩 채워 넣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졌다. 세부적인 순서는 그 이후에도 바뀌었지만,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원고를 끌고 나가야 할지 알 수 있었다. 나 같은 초보 작가에게 목차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이전 04화 착상 - 독자에게 착! 붙는 글이 되도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